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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랜드 Apr 11. 2021

딸 부잣집, 나라 설비

딸 부잣집, 나라 설비


 1996 가을, 나보소(나라 X 보라 X 소라)  부잣집은 부천시 소사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집은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과 설비 가게가 연결되어 있었다.  집은 가게에   개가 딸린 '가겟방'이었다. 이사를  첫날밤 7살의 나는 신이 나서 방과 가게를 오가며 뛰어다녔다. 소사동으로 이사를  뒤부터 아빠의 설비 가게는 IMF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되었고, 마음씨 좋은 주인집 할머니는   번의 전세 인상도 없이 6 동안 살게  주셨다. 그렇게 설비 가게에 딸린   개에서 우리 가족은 어려움 없이  살았다. "! ! !    짝짝짝!  외치던 2002년의 어느 , 부천시 소사동에도 부동산 투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인집 할머니께서는 방앗간  사장님에게 집을 통째로 매도하셨고, 우리가 살던 가겟방은 새로운 집주인의 방앗간으로 운영될 예정이라 우리 가족은 이사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1994년으로 돌아가서 우리 아빠는 설비 가게를 창업하기 전 한 건설사에서 설비 소장으로 근무하셨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으로 집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하에 1기 신도시 공급을 시작했고, 그래도 집이 부족하여 민간 주도하에 주택 공급을 장려하여 작은 시공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점차 경쟁이 심해지면서 경쟁에서 밀려나는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아빠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인천광역시에 빌라를 지었는데, 분양이 잘되지 않자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고, 회사에서는 월급 대신에 빌라 한 채를 '현물'로 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양가에서 지원받은 돈이 없이 신혼을 시작해서 부천시 심곡동에   칸에 신혼집을 마련하셨고 그곳에서 살며  ,  살의 딸을 키우셨다. 아빠는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진 덕분에 아빠 나이 29세에 생애  집을 소유할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빠는 월급을   없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어부지리로 받은 새집은 주택담보 대출을 끼고 있었던 터라 6% 원리금의 무게를 견뎌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막냇동생 소라가 태어났고, 2명만 낳고  기르자!라는 정부의 기조는 셋째 딸을 반겨 주지 않았다. 셋째 딸부터 출산 의료보험이 되지 않았던 터라 중동신도시 청약에   넣어 보았던 우리 가족의 주택청약통장을  버렸다.


 아빠는 딸 셋을 키우기 위해 회사를 나온 뒤 설비 가게를 창업하셨다. 아빠가 자영업은 처음이라 아빠의 사촌이 같이 동업을 하자고 제안을 했고, 동업의 끝은 모 아니면 도 아닌가? 사촌은 우리 가족에게 빚만 지게 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은 한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빠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0년 뒤 아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내 집 마련에 성공하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002년 8월 15일 광복절날 신축 빌라에 살 게 되었다. 이사를 하기 전날 밤에 나는 새로 이사 가는 집에서는 코딱지도 파지 않을 거라고 굳은 다짐을 했을 정도로 집을 소중하게 대했다. 부모님이 마련한 꿈의 빌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나보소 세 딸을 초, 중, 고 시절 그리고 4년제 대학 입학, 직장 취업까지 꿈을 꾸며 성장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빠의 내 집 마련은 이사를 한 번도 가지 않고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키우며 자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부모님 둘만 남은 허전한 집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자녀들을 키우던 사랑이 넘치던 온기는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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