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일지] 23번 게이트 여직원 배치 금지령

성희롱 하는 고객도 왕인가요?

by 낯선여름

현장에서 근무의 시작은 아침 브리핑으로 시작한다. 코로나로 공유파일 확인으로 대체되어, 매일 출근 전 혹은 하루 전 담당업무 인원 배치와 중요 체크리스트를 담은 파일이 전달된다. 우리는 마치 초조하게 기다리는 성적표를 열어보듯, 연애편지를 열 듯 기대하며 그 표를 연다. 그것은 누구와 오늘 하루를 일하고 함께 밥을 먹느냐의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운세, 하루의 기상예보 같다고나 할까. 역시 회사생활의 꽃은 좋은 동료와 함께 먹는 맛난 음식이 8할이다! 한번 정해지면 중간에 바뀌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그 날은 모처럼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배치가 되어 아침부터 콧노래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런데, 출근해서 2시간 쯤 지났을까. 갑자기 스케줄 담당하는 고참 매니저에게 변경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23번 게이트 (가상의 이름)에 배치된 여직원들은 그 곳으로 가지 말고, 변경된 내용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온 메세지에는 사유가 적혀있지 않았다. 점심 식사 때 만난 선배에게 이유를 묻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항공편에 우리 직원 성희롱 했던 고객 탑승하거든" 해당 고객의 탑승여부를 미리 알 수는 없어서 부랴부랴 남직원들로 대체했다고 했다. 회사와 매니저가 잘 대처해주는구나하는 생각에 든든한 마음도 들었지만, 여성으로서 이런 일이 아직도 일어나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서비스업의 비애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약자로 노출된다. 거기에 여성이기까지 하면 그 서비스업의 위계도에서도 가장 하층으로 내려 앉는다. 대체로 고객들은 남자 직원들에게 더 예의 바르게 대하고, 언성을 높이는 비율도 적다.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무시도 이쯤되면 무뎌질만 한데, 일터에서 우리 동료가 고객에게 욕설을 당하는 경우나 너무 심한 정신적 폭력을 당할 때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런데 성희롱이라니. 내 동료가, 혹은 내가 성희롱을 당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크고 작게 당한 분들도 많았을텐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넘겨버린 것도 부끄러워진다.


'회사에서 악성 고객들은 모두 탑승 거절, 판매 거절하면 안되나?' 회사로서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난 몇 년 간 큰 사건들이 언론에 공개되며 법안 마련이 되었지만, 기내 난동으로 항공기 운항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상황, 폭언 등의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 아마도 공항경찰대 출동하는 정도의 큰 사건에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법적인 근거가 아직 완전하게 갖춰지지 않았다. 게다가 성희롱이라는 것은 때로는 노골적이어서 증거로 삼을만 하지만, 대부분은 은밀히 이뤄지니 처음 본 고객을 상대로 현장에서 고발 등의 조치를 바로 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이 무엇이든 제도적으로 받춰주지 않으면, 쉬쉬하며 이렇게 직원 배치만 피해주는 선에서 끝나면, 이 반복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것인가.


나란 사람은 그저 아침의 업무 배정을 받으면, 누구랑 밥 먹을지 생각하고, 언제 쉬는 시간인지부터 쳐다보는 단순한 현장 노동자이건만, 오늘의 해프닝은 여러 생각이 나게 만든다. 몇 년 새 있었던 큰 사건들이며, 내 동료들이 일터에서 무수히 겪지만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고 각종 병을 얻게 하거나, 마음 속 깊이 묻어둔 각종 일화들. 때로 분노했지만 종종 술안주로 털어버린 일들. 내가 주니어였을 때에 우리는 감히 고객을 신고할 생각을 못했다. '고객은 왕'이라고 주입받은 세대이다. 시끄러운 일을 만들며 조직에서 튀면 안된다는 생각에, 억울한 일이 있어도 넘어갔다. 그런 선배들의 일화를 보고 들으며 억울한 일은 늘 있게 마련이며, 저렇게 무난하게 넘겨야 한다고 무의식으로 학습했다.


지난 주에 공항에서 욕설을 심하게 한 고객을 경찰에 신고한 후 조사 받으러 다니느라 지친다는 어린 후배가 떠올랐다. 끝까지 하대하는 고객을 신고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본인과 목격 직원까지 업무를 빠지게 되어 미안하고 조금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그녀들을 보며 선배세대로 부끄럽기도 한 한편, 요즘 친구들은 참 당차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알려야만 그들이 당한 행동이 우리가 겪으면 안되는 일임을 알릴 수 있다. 또 그것을 보고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결국은 그런 용기들이 모여 악습과 구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비스 업계의 표어 '고객은 왕이다'를 다시 생각한다. 이윤을 내야 하는 민간 회사에서 고객은 여전히 가장 소중하다. 그리고 선량한 고객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성희롱을 하는 고객이라면? 그 사람은 성회롱범, 즉 범죄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고객에서 성관련 범죄자 리스트를 발견하는 일이 없기를, 우리 직원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일하기를 바래보는 서비스업 노동자의 오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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