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바라보는 마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하는 이주자와 자기 결정에 따라 여행하는 자가 보는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따뜻한 햇살의 봄기운이 만연하다. 여기저기 피기 시작한 꽃들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봄기운의 향연에 변덕스러운 날씨가 가세한다. 강한 돌풍은 작은 불씨를 거대한 불기둥으로 산을 태워버린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태운 불은 나무를 삼키고 산을 온통 태워 버린다. 삼킬 듯이 달려드는 불을 피해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뉴스를 통해 나온다. 그들의 놀란 가슴은 정든 집과 마을을 등짐에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아찔하기 때문이다.
하루에서 여러 번 울리는 안전문자에는 산불조심이라는 경고 메시지가 뜬다. 그 문자를 보며 집을 잃고 황폐해진 산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곧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며 그 생각은 묻혀버린다.
지구라는 곳에서 같이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야는 한없이 주관적으로 흐른다. 나와 관계되는 일에는 작은 것에도 흥분하면서도 터전을 잃고 아파하는 이들의 모습은 강 건너 불구경처럼 바라본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곧 우리의 일상에서 희석되어 버린다. 지금 여기의 삶으로 돌아와 그들과 다른 일상을 살아간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바라는 것만 경험하고 살 수는 없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나는 일을 수용하거나 개척해 가야 한다. 그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기대를 가지고 경험하고 싶은 기대를 안고 또 다른 일상을 선택하는 것이 여행일 수 있다. 다른 환경을 접하며 자신의 필터로 걸러지는 것을 보며 만족해한다. 때론 예상치 못한 일시적인 여행 속 변수를 즐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상이 아닌 잠시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한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여행자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거주자로 살아간다. 자신의 정착지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며 살아간다. 그들이 밭을 일구고 동물을 키우며 산의 자원과 함께 살아가듯 말이다. 환상의 시야는 일상의 현실적 시야로 바뀐다.
여행자의 시야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타버린 집과 산, 화상 입은 동물과 화염에 목숨을 잃은 분들, 그리고 불과 사투를 벌인 많은 이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정제된 환상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돼버렸다. 보이는 것과 마친가지로 느껴지는 것 또한 모두에게 똑같아진다.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부주의와 화마가 삼키고 간 흔적들의 아픔이다. 여행자는 자신의 주관적 시야로 보이는 것을 바라본다. 그 마음이 때론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보게 한다. 전체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보이는 것과 그 이면의 이야기까지 느끼게 된다. 일상을 사는 이가 여행자로 이동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정제된 환상의 시선은 일상의 불협 화음에서 조율하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의 마음이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같아질 때가 있다. 자신의 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할 때이다. 자신의 여행이 일상이라고 생각될 때일 것이다. 무뎌진 마음을 다시 살리는 것은 오늘의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여행자의 모습으로 바라볼 때이다. 산불로 이주민이 되어야 하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일상에서의 삶이 무뎌진 이들, 또 여행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이들 모두 잠시 머무르는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