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보다 광주
할머니를 뵙고 떠나는 정읍 버스터미널에서 염두한 다음 행선지 담양의 버스가 막 떠나 버렸다.
상행선 하행선을 잘못 보고 여유를 부리다 버스를 보내 버렸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려니 그냥 광주행 버스를 타자는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영상으로 본 광주에 관한 내용도 있어서 꼭 한 번은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었다. 자연을 보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한 단면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을 등한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구가 120만 명이 넘는 광주는 서울의 붐비는 여느 대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높고 신축한 아파트 건물들과 깨끗한 상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내린 후 첫 방문지로 국립 박물관을 가 보기로 했다.
멋있는 박물관의 모습은 청와대의 절개와 깔끔함과 닮아 보였다. 정문에서 박물관 입구까지 쭉 이어진 길을 하늘의 구름이 맞아하고 나무들이 안내하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중간의 연못을 돌다리로 건너가니 어느덧 쭉 이어진 길 앞의 박물관 정문이 눈앞에 드러났다.
마침 도자기 전시가 한창이었다.
전남 신안 바다에서 침몰한 600여 년 전 중국상선에 실렸던 문화유산 전시로 그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양한 자기의 아름다움의 발굴 기술에 놀라워할 때 더불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영원한 삶을 위한 선물인, 상형토기였다.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사후 세계로 행하는 장송의례로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는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동물, 집, 수레, 배 등을 축소해서 만든 제의용 그릇과 죽은 이들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는 새 모양의 토기는 편안한 쉼을 누릴 수 있게 무덤에 넣었다고 한다. 1600여 년 전 사람들의 내세관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이전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던 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스스로를 신기해하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현대적 시설과 역사적 가치가 만난 박물관 이야기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보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새로운 곳을 가면 먼저 박물관을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난 뚜벅이 여행을 좋아한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배낭을 메고 구글지도를 참조해 숙소를 향하는 길들을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도 좋으련만 그렇게 걷기 시작하자 10km가 넘게 걷게 되었다. 주변의 먹거리 식당도 보이지 않는 도로변을 걷다 광주에서의 첫 식사를 순댓국으로 하게 되었다. 막깔스러운 전라도 김치와 함께 토종 순댓국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니 무거운 눈꺼풀이 제법 올라가 버렸다. 숙소에 들어가니 낯섦이 짙어졌다. 익숙한 집을 벗어나 늘 떠나고픈 여행이었지만 처음의 낯섦은 견뎌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조용한 나만을 위한 채움의 여행이었기에 말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음이 필요하다면 그동안 보고 싶었던 넥플리스 드라마를 몰아보며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렸다.
다음 날 무등산을 택하기보다는 광주 기념문화관과 광장을 가기로 했다. 그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택시기사 아저씨의 친절한 안내로 잠시 들린 문화관 넘어 광주 광장을 가게 되었다. 시설 보수가 이뤄지고 있었기에 사진으로 보게 되는 거의 50여 년 전의 사진으로 그 시절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아들의 주검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와 시청 점검에서 발생한 시신들을 모아둔 운구까지 오래된 역사적 사실은 아직도 그 시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겨누지 말아야 할 총구로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말이다. 강압의 희생과 싸움은 늘 그 흔적을 남긴다. 몸의 흉터처럼 마음에도 지역감정이라는 깊은 골을 남긴다. 서로를 갈라서게 하고 비난하게 하는 모습은 지금도 이 순간에도 집 밖과 집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면 좋으련만 서로의 다름을 헐뜯고 손가락질한다. 끝이 없는 싸움이다.
광주 광장 옆 아시아 문화센터의 아름다운 조경을 감상하며 광주를 떠나게 되었다. 잠시 머무른 곳이지만 대한민국 사람으로 나 또한 책임을 가지고 알아야 할 의무감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