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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Sep 06. 2022

제주도, 딸과 함께 도보 여행

제주도 첫날, 제주 공항에서 이호테우 해수욕장

2021년 12월.

코로나 시국 일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연일 새로운 대처 방안들이 쏟아졌다.

나는 1차 백신을 맞았고, 몸에 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그 후유증 때문에 2차 백신 맞는 것을 포기했다.

후유증이 잦아들자 이번엔 갱년기 증상이 바통을 받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선풍기를 켰다 껐다. 밤엔 상황이 더 나빴다. 그런 밤을 보내고 일어나면 손가락 관절이 붓고 아파서 주먹을 쥐는 것조차 힘들고, 하루 종일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갱년기는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는 폭풍 속으로 몰아넣는 것만 같았다.


큰 딸은 9개월 동안 방송국 프리랜스 조연출 생활을 했다.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강도 높은 노동으로 딸은 번아웃이 왔고, 병원 신세를 지기 직전 12월 17일 퇴사를 했다.


우리 모녀에겐 각자 환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12월 20일 오후 2시 20분 티웨이 항공을 타고 제주로 떠났다.

9박 10일 동안 배낭을 메고 제주 한 바퀴를 걷는 도보여행. 그러나 제주 올레길은 그 기간 동안 다 돌 수 없는 거리여서 우린 자전거 도로를 선택했다.

첫날은 17km, 그 이후는 대략 26km. 그렇게 걷기로 계획을 짰다.

남편과 작은 딸의 염려와 걱정은 집에 고이 내려놓고, 풍선처럼 부푼 기대감만 배낭에 꾹꾹 채웠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입은 롱패딩이 무색하리만치 제주도의 날씨는 마치 4월의 봄날 같았다.

우리들이 출발점은 용두암 인증센터. 거기를 가기 위해 카카오 맵을 켰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야 하는 노선이었다. "이 정도면 누워서 잠자기지." 라며 우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까지 우린 서울의 빠르고 편한 환승을 당연시했다. 환승버스를 조금만 기다리면 탈 줄 았았다. 사실 그전까지 제주도 여행을 렌터카로 돌았기에 제주도의 대중교통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몰랐다. '00 버스가 5분 뒤에 도착합니다.'이런 멘트까진 바라진 않았다. 적어도 카카오 맵에선 다음 버스가 언제 오는지에 대한 정보가 뜰 줄 알았다. 카카오 맵도 그 어떤 곳에서도 우리가 타야 할 버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무리 4월의 봄 날씨 같지만, 겨울이었다. 마냥 버스를 기다릴 순 없었다. 우리가 오늘 걸어야 할 길은 17.68km였다. 서로를 날씨 요정이라고 추켜세우며, 우리 모녀는 걷기로 했다. 등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 플러스 롱패딩의 무게는 도합 10kg 가까이 되었지만, 마냥 햇살과 바람이 좋았다. 딸은 카카오 맵을 보면서 앞장서고, 나는 새로운 풍경이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고 조금씩 뒤처졌다.

[노을 지는 이호테우해변. 2021]

어두워지기 전에 좀 더 빨리 걸어야 했지만, 아름다운 노을이 발길을 자꾸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엄마, 쫌만 빨리 걸어." 기어이 딸이 한 마디 했다. 어반도 못하는데 숙소에 가서 그릴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고 싶은 철없는 엄마와 철든 딸의 여행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을 준비할 때 나는 딸에게 "엄마가 이제까지 여행 갈 때마다 앞장섰으니까, 이번엔 니가 다 해라."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했으니 나 역시 딸의 말을 들어야 했다.   


해가 지고,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순식간. 낮의 기온과는 상관없이 어둠은 급속도로 찾아왔다. 그러나 내 앞엔 SNS에서만 보았던 이호테우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노을 지는 이호테우 해변을 연신 폰카메라에 담는다고 손과 마음이 분주했다.

그때,  내 앞에서 걷던 딸의 짧고 굵은 단말마와 함께 모래바닥으로 맥없이 풀썩 주저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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