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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Sep 08. 2023

안녕, 래프!

사려니 숲의 추억

제주의 마지막 날, 우린 사려니 숲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엊그제 내린 눈으로 숲은 통제가 되어 들어갈 수 없었다. 굳이 숲을 들어가지 않고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온 몇 사람들은 통제된 안내판을 보고 그냥 되돌아갔다. 우린 길을 건너 숲 입구 맞은편으로 가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으며 발자국을 남겼다. 한동안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남기며 즐거웠다.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작은 눈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는데 딸은 겨울왕국에 나온 laugh를 만들고 싶다고. 이틀 전에 온 눈이라 그런지 몰라도 생각처럼 눈이 뭉쳐지지 않았다. 간간히 나뭇잎에서 눈뭉치가 땅으로 툭.. 소리와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를 제외하면 숲의 오후는 정말 고요했다. 


laugh의 살 여기저기가 자꾸 툭툭 떨어졌다. 떨어진 눈을 다시 붙이고, 떨어지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그러는 동안은 손은 점점 빨개지고. 반지르르한 laugh는 포기하고, 눈과 단추를 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단추와 눈도 자꾸 떨어졌다. 그래도 애꾸눈 래프는 만들 수 없어 눈은 붙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붙였지만, 단추 두 개는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나뭇가지로 래프의 머리와 손 그리고 입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한 시간가량 만든 것치곤 볼품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래프는 웃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래프와 사진도 찍었다. 사람마다 사려니 숲의 기억이나 추억은 다르겠지만, 우리에겐 사려니 숲은 언제나 우리의 래프의 환한 미소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2021. 도보 여행 마지막 그림일기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힘들 때 참는 건 이류

힘들 때 먹는 건 육류

제주의 마지막 밤의 성찬을 위해 동문시장으로 가는 길에 본 어느 노점의 글귀. 사장님의 위트에 힘들지 않지만 육류를 먹어볼까 생각하며 발길을 멈췄다. 그러나 아직 영업 전이어서 먹지 못했다. 힘들 때 먹는 육류의 맛은 모르겠지만, 가던 길을 멈추게 할 정도의 필력을 가진 사장님이라면 분명 힘들 때 먹으면 힘이 솟아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주 길에서 만났던 모든 순간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다. 건강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기에 오늘도 열심히 체력을 기르는 중이다. 그 길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좀 더 빠른 시일 안에 다시 길을 떠나고 싶다.

2021. 이곳에 우리의 래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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