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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Aug 31. 2023

눈이 푹푹 내리는 밤의 함덕

엄마와 딸

발 통증이 한계치에 다다르기 전에 겨우 인증 도장을 찍는 곳에 도착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벤치에 내려놓고, 그 옆에 지친 몸도 내려놓았다. 그제야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강풍과 눈발에도 속을 알 수 없는 바다는 평온해 보였다. 바다 위로 떨어진 눈송이들은 바다라는 집으로 돌아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지친 하루, 돌아갈 집이 있으면 위안이 된다. 눈송이도 나도.

"숙소는 얼마나 더 가야 돼?"

나는 인증 도장을 찍고 나오는 딸에게 물었다.

"잠깐만. "

"........."

짧은 침묵 속에서도 눈발은 점점 더 거셌다.

" 카맵에선 20분이라는데, 좀 더 빨리 걸으면 그거보다 빠를 거 같아."

20분 거리에 숙소가 있다는 것은 아픈 발에게 보내는 응원의 한 마디였다. 


강풍과 눈 때문에 저녁을 사러 간 딸은 짐을 정리하고, 씻는 동안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커튼을 젖혔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여느 엄마처럼 나도 걱정이 앞서 전화를 걸었다.

" 눈도 많이 오는데, 어디야?"

" 엄마, 전화받을 손이 없어. 금방 갈 테니까 끊는다." 

이번 도보여행에서 더 이상 나는 보호자가 아니라, 큰딸이 나의 보호자였다.

아무리 젊은 몸이라도 지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딸은 가끔 궁시렁될 뿐 여행 내내 나를 먼저 배려했다. 배려하는 딸이 기특하고 대견하고 뿌듯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비집고 올라왔다. 오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살았지만, 지금의 감정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자식은 언제고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나의 마음을 알게 되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생각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것이라 계속하다 보면 이성이 아닌 감정에 휘둘린다. 더 휘둘리기 전에 서둘러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내게 그림은 잡념 퇴치에 최고다. 그리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그림에만 집중.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명상. 보통 명상은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기에 내 숨의 들고나감을 알지 못한다. 다만 움직이는 손과 그 손을 따라 움직이는 눈의 움직임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변수도 있다. 자식이 연락이 닿지 않을 땐, 집중도 잘 안되었다.

[2021.12.26, 그림일기]

억지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기다리던 딸이 두 손 가득 봉지를 들고 있었다. 봉지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딸 손에 있는 짐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딸은 자기가 든 흰색 봉지를 풀었다.

" 눈도 많이 오는데 그냥 편의점에서 대충 한 끼 때우면 되지."

" 엄마가 갈치조림 먹고 싶다고 했잖아. 이 집이 좀 멀긴 한데, 그래도 후기 보니까 이 집이 안 달고 msg도 안 넣고 현지인 맛집이래... 감동이지 ㅎㅎ"

나는 잠시 딸을 보았다. 추워서 빨개진 손엔 비닐봉지 끈을 잡은 흔적들이 어지러운 선이 되어 있었다. 


딸이 눈을 뚫고 사온 갈치조림은 이번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딸에게 갈치조림을 몇 번을 권해도, 자긴 갈치조림을 안 좋아한다며 편의점에서 사 온 짜장컵라면을 먹는다. 

먹은 것들을 뒷정리하고 스케치북을 펼치는데 딸이 흥얼흥얼 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나는 갈치조림이 싫다고 말했지~"

밤은 깊어가고, 딸의 흥얼거리는 소리.

창밖엔 여전히 함박눈이 푹푹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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