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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Sep 01. 2023

전하지 못한 사진

255,345 걸음의 끝

오늘만 걸으면 고생 끝.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아침부터 조금 서둘렀다. 

다행히 눈은 오지 않았다. 

인도(人道)는 제설작업을 한 건지 아니면 기온이 높아 눈이 녹은 건지 어젯밤 폭설 치고는 거리가 말끔했다. 

해가 들지 않는 응달만 좀 미끄러웠는데 걷는 내내 긴장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했다.


마지막 인증 도장을 찍을 센터가 용두암이었다. 거리로는 16킬로미터. 그 길을 한 눈 팔지 않고 자전거 도로만 걸어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행이란 게 계획대로 된다면 그것이 여행이겠나.


어제와 오늘은 다른 새 날이다. 그러나 오늘의 제주는 어제와는 다르게 색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하얀색. 물론 밤에 추가된 색이다. 그 하얀색이 닿는 부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상상해 보라. 검은 현무암 밭담 위의 하얀 눈을. 밭담 너머 푸른 초록 작물 위에 솔잎 위에 살포시 얹어진 하얀 눈 그리고 주황 지붕 처마에 쌓인 하얀 눈. 변덕스럽고 심술굳은 바람이 와서도 차마 아름다워 포기하고 돌아서는 풍경이었다. 계획하고 작정하고 떠났다면 소소한 풍경들을 눈여겨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별 기대 없는 거리에서 만난 풍경이 더없이 좋았다. 흔히 보는 소방서, 그 앞에 세워진 돌하르방 여기까진 제주니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르방에게 산타클로스 옷은 나로선 생각지 못 한 전개였다. 

그리고 해안가를 따라 걷다 만나게 된 용천. 그전까지 용천수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런데 그 용천이란 것이 제주전역엔 661개가 있다나. 더군다나 용천도 용천이지만 그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갈 길 바쁜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엄마, 이 주변에 삼양해수욕장이 있다는데 가볼래?"

"해수욕장?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 검은 모래 해변이라는데."

" 그럼 화장실 들렸다가 잠깐 보자."


나와 딸은 딱딱한 아스팔트길만 걷다 보니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발과 발목이 많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적어도 모래사장은 아스팔트처럼 딱딱하진 않으니까.

입구에서 해변을 살짝 보았다. 이제까지 8일 동안 보았던 하얀 모래 대신 검은 모래해변일 뿐.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검은 모래사장 위로 먹구름이 점점 번지고 있었지만, 우리의 도보 여행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해변을 조금 걷기로 했다.

그때 바닷물 가까이 우두커니 서있는 분을 보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홀로 우두커니 서있는 남자.

처음엔 뭐지? 생각했지만 이내  그 남자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처럼 바닷소리를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린 일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래사장을 나와 인도로 걸었다. 그때 보게 된 검은 모래해변에 그 남자와 그 남자의 그림자. 그 장면이 시선을 사로잡아서 전해줄 수도 없는 사진을 연신 찍었다

삼양해수욕장, 2021


눈 힐링을 하고 난 뒤 우린 전투적으로 걸었다. 왜냐면 먹구름이 떼로 몰려왔을 때는 그럴 이유가 있는 거니까. 어제처럼 강풍은 아니었지만 눈발이 휘날렸다. 어제 경험으로 미뤄 짐작했을 때 언제 폭설로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한라산이 떡 버티고 있는 제주의 날씨는 기상청도 파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조금 아쉬웠는지 딸이 두맹이 마을이 벽화로 유명하다며 들리자고 했다.

서울에 이화 벽화마을이 예쁜 것이 생각나서 군소리하지 않고 딸의 말에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두맹이 마을의 벽화는 다 좋았다. 그중 특히 담장 전체 그려진 큰 고래는 그날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아떨어져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두맹이 마을, 2022

도보 여행 출발할 때와 달리 용두암 인증센터에 가기 전에 용두암으로 내려갔다. 용두암 입구 표석판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관광객 한 분이 사진을 부탁해서 찍어드렸다. 유명관광지라 그런지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며 만난 사람들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용두암에 있었다. 

" 내려가볼래?"

내가 용두암을 턱짓으로 가리켜 딸에게 물었다.

" 엄만 가고 싶어?"

" 굳이.."

"나도 이걸로 만족해." 

우린 막상 도보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한 발짝도 허투루 걷기 싫었다.  


나는 100% 다 걷지 않아서 완주 도장을 찍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러나 딸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걸은 255,345보의 흔적을 남기는 의미로 완주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완주 도장이 사실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걷는 게 중요하지. 그럼에도 이제까지 스탬프와 달리 삐까 번쩍한 도장을 받고, 선물로 스티커도 받으니까 정말 도보 여행이 끝난 것이 실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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