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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Aug 28. 2023

갈매기의 지혜

만리장성보다 더 길다는 제주 밭담

김녕 밭담은 지난밤 급조한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불던 바람은 점점 그 강도가 강해졌다. 바람에 휘둘릴 만큼 가볍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딸은 바람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다. 갈매기가 바람에 떠밀려 저만치 밀려났다. 인간도 이런데 갈매기의 날개는 오죽이나 할까. 도저히 걸을 수 없는 바람이라 잠시 멈춰 서서 갈매기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면 갈매기는 그냥 자신의 몸을 바람에 맡겼다가가 바람이 약하거나 멈췄을 때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날갯짓을 해 날아갔다.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리빙스턴은 아니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갈매기가 바람 앞에서 대처하는 지혜를 배웠다. 우리도 갈매기를 따라 앞에서 부는 거센 바람은 거스르지 않고 잠깐 동안 돌아서 멈추고, 약하거나 멈췄을 땐 재빨리 앞으로 걸어 나갔다. 특히 바람이 뒤에서 불었을 땐 우리가 맨 배낭 무게를 바람이 일정 부분 들어주어서, 앞에서 바람이 불었을 때 잠깐 지체했던 시간들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동안 풍력발전기는 바람을 만나 열심히 돌았다. 딸은 풍력발전기를 볼 때마다 정말 좋아했다.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이유 없이 좋단다. 하긴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드디어 김녕밭담길. 처음엔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밭담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왔다. 

마트 냉장코너가 아닌 노지에서 푸르고 싱싱한 무와 브로콜리 등등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아무런 작물이 없는 밭도 있었지만. 

김녕 밭담, 2022

끝없이 이어진 밭담길을 걷다 보니 새삼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우리 같은 여행자는 이곳이 관광지지만, 사실 여긴 농민들의 고된 삶의 현장이다.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자세히는 모른다. 그렇지만 예전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조금은 안다. 농작물보다 잡초는 정말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자란다. 그래서인지 농사를 크게 짓는 사람들은 밭에 검은 비닐을 깔고 작물을 심었다. 비닐을 덮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뒤처리는 조금 아쉬웠다. 물론 수거한 비닐을 깔끔하게 처리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밭담사이 난 땅속에 파묻힌 것들이 곳곳에 보였고, 바람에 날아왔는지 밭담 여기저기 걸쳐진 검은 비닐들 때문에 걱정이었다. 비닐이 썩는 시간은 30년. 매년 버려진다면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약이 없는 거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밭담은 이색적이었다. 제주의 삼다 중 바람과 돌, 그 둘은 화살과 방패로 제주의 밭에 공존하고 있었기에.


웬만하면 강풍이 부는데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날 코스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버스가 있다 한 들 강풍부는 길에 딸을 두고 나만 버스를 탈 수도 없을 거 같았다. 밭담을 벗어난 우리는 묵묵히 함덕으로 걸었다.

그 길에서 눈을 만났다. 처음엔 한 두 송이던 눈송이는 점점 거세졌다.

여행을 하면 꼭 아침에 일어나하는 일이 일기예보 체크였다. 분명 제주 산간지방만만 폭설이었는데, 그 세력이 이곳 함덕까지 확장되었나 보다.


잠깐은 눈이 좋아 두 팔을 벌리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나 강풍을 동반한 눈발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큰딸은 다행히 안경을 착용하고 있어 괜찮았지만, 나는 난감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눈이 조금 더 큰 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다른 사람보다 이물질이 눈으로 잘 들어가는 편이라.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자꾸 뒤처지는 나를 기다려주는 딸. 우리가 계획한 시간보다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그 보다 밭담에서부터 아파오기 시작한 발이 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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