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유조이 Oct 02. 2023

남기고 싶은 반지 하나 지니고 삽니다

남기고 싶은 반지를 보며 반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할머니는 일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언니와 저를 키웠습니다. 새벽녘에 선잠이 깨면 할머니는 두껍고 따뜻한 손으로 "아직 아침 멀었다. 좀 더 자라"하며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달콤한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곤 했습니다. 할머니 손은 거칠고 주름이 깊었습니다. 왼손 검지는 손가락 반마디 정도 짧고 뭉툭한데 두껍고 검은 손톱이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새댁시절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장작을 팼다가 손도끼에 손톱이 잘려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 손에는 항상 누런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빗살모양 장식이 새겨진 굵은 쌍가락지입니다.


  할머니는 정갈하셨지만 자신을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던 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씻을 때마다 반지에 비누가 끼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 번도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리자 손가락 살은 빠지고 마디는 굵어져서 반지는 약지에서 뱅글뱅글 돌았지만 다행히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수시로 반지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에게 금쌍가락지는 평생 단 한 번의 사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남에게 자랑하는 사치가 아니라 더 깊은 자기 위안으로서의 사치입니다. 자기 인생도 괜찮았다는 표식으로서의 반지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 손은 마디가 짧은 뭉툭한 검지와 한쌍의 금반지입니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결혼반지를 리세팅하면서 처음으로 최고급을  지향했습니다. 이전에는 가 본 적 없는 최고급 매장에서 가격은 고려하지 않고 제 취향에 맞는 디자인만 고려했습니다.  평소의 저답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하나쯤은 최고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최고가 아니라 내가 부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고를 선택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선택이 반지가 아니라 명품가방이나 시계가 될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한 한 번의 사치를 스스로에게 선물합니다.


  저는 반지를 선택했고 이 반지가 딸에게서 손녀에게로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소중하게 사용하고 물려주고 싶습니다. 훗 날,  제가 그랬듯 반지를 보며 제 손녀가 나를 기억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상상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기에 지금은 반지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약지의 반지를 어루만지며  오늘을 아름답고 빛나게 살고자 마음먹습니다. 남기고 싶은 반지를 보며 반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전 16화 눈치 보지 않고 입고 싶은 대로 입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