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쇠책방 Dec 04. 2023

문을 열고 나온 마음

해야만 한다지 않소

https://brunch.co.kr/@kih451145/21



살다 보니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하고 싶은 것도 생기더라.

책 읽는 게 그렇고, 이렇게 뭔가를 쓰는 것도

내게는 기어이 하고 싶은 무엇이다.

<달과 6펜스>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라고 말하며 그동안 뿌리내린 안정된 자신을 떠나온 이유를 조금은 알것 같다. 그것이 숨을 쉬게 하는 '공기'였겠구나. 그림을 그려서 그것으로 명예를 얻겠다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자기를 발산하고 승화되고 싶었구나.


사람들은 나에게 도대체 매일 머리를 박고 뭘 하는 것이냐고 조금은 이상하게 물었다. 자기 보고 매일 이렇게 있으라면 못할 거 같은데 신기하다했다. 일터에서 이렇게 책을 끼고 살다 보니 차라리 책방을 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도 했다. 나는 책이 읽고 싶은데 책이 일이 되면 못 읽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15년째 부부 자영업자로 살고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 한 줄의 문장이 나의 50%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이 주는 고정값으로 생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우리가 하는 일이 식당이나 잔일이 많은 서비스업은 아니라서 시간적으로 남들보다는 자유로운 편이다. 다만 몸은 매장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좋아하게 된 말이 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


독서를 통해 수많은 여행을 했다. 시공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다양한 경험과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대단한 사유의 세계를 만났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나의 실재 여행은 내 삶이지 않느냐고. 이 역시 내게는 실재하는 경험이다.


열쇠도장은 우리 부부의 일이고 책은 나의 소명이 되었다. 남편의 소명은 아직 모르겠다. 농담 삼아하는 말이 있다면 '나는 아마 일만 하다가 죽을 거야'였다. 남편도 자신이 좋아하는 뭔가를 찾아보려 하긴 하지만 대부분 소모적인 것들이어서 그 흥미가 길게 가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열심히 하는 것은 드리마와 영화를 챙겨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나는 책으로 그는 영화로 산다. 책과 영화는 다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소명이지 별거 있겠어. 내가 선택한 행위는 독서인데 독서에 쓰는 시간보다 일을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야? 하는 내 안의 소리도 크게 들린다. (돈 벌어서 여유롭게 하고 싶은 게 독서인데 그거 지금 하는 거잖아.)



업의 협소한 가게 한쪽에 놓아둔 작은 책상과 선반에 가득한 책을 보며 손님들이 가끔 묻는다.

"이 책들도 파는 거예요?"

"아~ 아니에요. 읽는 책이에요."

흔치 않은 광경이기에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한마디 해주시고 그렇지 않으신 분들에겐 이 한쪽 구석의 열쇠책방이 보이지 않는다.


불-스스로 깨달은 자

법-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한 가르침

승-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자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법륜스님의 말씀을 통해 처음 인식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종교를 믿음으로 생각하고 접했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끊임없이 나를 수련하는 과정에서의 등불 정도로 생각해 보니 인간의 완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성삼위 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도 예수도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에 도달해 보는 것. 내가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런 과정이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번뇌는 깨달음을 통해 사라진다.

찰나의 작은 깨달음들통해 인생에서 얻은 번뇌를 누구도 아닌 스스로 없애게 된다. 독서가 그런 과정이었던 것 같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지만

지혜로운 방식으로

깨달은 자들을 책에서 만난다.

그 지혜를 간접 경험하는 동안

책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에다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함께

덧대어 내려놓을 때마다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잊었던 나를 발견하는 특별한 장소 같았고

묵은 검정을 비워내는 일이기도 했다.

무언가가 정화되고 있다.



옷장에 가득 넣어두고서 다시는 입지 않을 옷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도 못하며

이사 때마다 끌고 다니는 묵직함 같은 것.

이상하게글로 쓰는 만큼 그것들이 비워지고

지금 바로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다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게 작지 않은 위안이 되더라. 그 위안은 나를 나이게 만드는 힘이 되더라.


따끔한 충고, 기대 섞인 조언, 애정 어린 응원 그 무엇도 예전에는 듣지 못했다. 이게 나 자신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피드백.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 일기장을 내면 빨간 글씨로 쓰인 몇 줄의 글에 오글 거리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나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다이어리와 책 귀퉁이에 쓰는 말들은 누구도 아닌 내가 읽는다. 그것이 인생 처음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는 피드백이었다. 나는 나와 그렇게 소통을 시작했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내 별을 봐,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어."

"내 우물을 봐, 바로 내 안에 있어."

-어린 왕자 중에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중에서




책으로 읽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동안

피드백을 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안의 작은 불씨를 이해해 주었다. 

 불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따뜻해지고 있다.



내가 닫아걸었던 문,

결국 안에서 잠긴 문이었는데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함께 책 얘기 하고, 사는 얘기도 하고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이

나다울 수 있다.



숨긴 것들도 많다.

부끄러워 꺼내지 못하는 것

미안한 것들은 더 많다.


그래도 나답다고 말하고 싶다.

나도 너 같고 너도 나 같을 뿐이다.



말없이 곁에 서주고

말없이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과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나눈다.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 평온하고

나도 함께 평온해지기를 바란다.



'다름'으로 발견한 '나다움'을 꺼내

스스로 닫은 문을 열고

내 안의 어둠을 밝힐 수 있고,

차가움을 녹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이해하고 싶었고

너를 이해하고 싶었고

우리를 끌어안고 싶었다.



나는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한 곳에 뿌리내리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스스로 뿌리를 거두고 움직여보니 언제든지 가고픈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나는 이렇게 감정의 바닥에서 환희의 끝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책과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