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누구도 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
내가 어려서 아직 국민학교도 안 다니던 시절에 일곱 식구가 한 방에서 모여서 살았다.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쪼르르 누워서 잠을 자던 시절.
겨울이면 김장을 120 포기씩 온 마당에 뿌려 놓고, 같은 집에 살던 사람들 모두 모여서 품앗이로 서로의 김장을 담갔다.
TV는 주인집만 있어서 저녁마다 TV를 보러 갔고, 그때 김일의 레슬링이 있는 날이면 같이 살던 대여섯 집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응원을 하면서 TV를 보았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하나가 있었고 아침마다 화장실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겨울이면 그 화장실이 얼어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서울의 더 올라갈 곳 없는 산동네에 똥지게를 매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저녁에 방 한가운데 누워서 자다 보면 머리맡에 떠 놓았던 물도 얼어 버리던 겨울이었지만, 행복했던 것 같다.
겨울이면 산동네 아이들이 연탄재를 뿌려 놓고 비료 포대를 타면서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민학교는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22 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거의 70 명에 가까웠다.
그런 어린 시절.
엄마는 그 많은 식구들의 밥을 다 해대었겠지. 오빠들이 공장 가면 먹을 도시락까지 싸면서 말이다.
이미 건강은 나빠지셨지만 둘째 오빠가 엄마를 모시고 조카들까지 데리고 갔었고, 큰오빠 내외와 조카, 그리고 언니네와 조카 모두 15 명이 산사를 찾았을 때 절에서는 가장 크고 깨끗한 방에 새 이불을 내주셨다.
산사에서 자면서도 이제 결코 이런 시간들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을 했다.
여러 명이 모여 자다 보면, 누구 하나 이야기를 꺼내기 마련이고 또 밤새 잠 못 들면서 이야기에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한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주로 어려서부터 엉뚱한 일을 많이 만들었던 언니의 엽기적인 이야기로 조카들까지 모두 웃느라 잠을 못 자던 시간들.
지금은 서로 각자의 가족으로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잠깐 만나 농담이나 오고 가며 말없이 제사를 지낼 뿐 같이 모여 잠을 자진 않는다.
여행도 같이 가지 않는다.
각자의 가족인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잠을 잔 이후로 이젠 그러한 날들은 없다.
한 가족이 분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아마도 형제 중에 누군가의 부음이 있으면 다시 모여 그것을 슬퍼하겠지만.
먼저 간 이는 가슴에 묻는다.
헤어진 사람도 가슴에 묻는다.
사랑한 사람도 가슴에 묻는다.
앞으로의 삶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적다는 것을 안다.
이혼을 했다고 해서 엄마나 아빠라는 천륜이 끊어지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나의 노후에 자식과 같이 사는 모습이나, 보살핌을 받는 모습은 없다. 아들은 아들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가끔 친구처럼 만나면 된다. 서로 도움이 필요하면 그만큼의 객관적인 방식으로 도움을 주겠지만, 본격적인 관여는 하지 않는다.
자식이 어떻게 살던 손님처럼 대하기로 한다.
내 최대의 희망이라면 임종에나 한번 놀러 오듯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느 때 어떤 형식으로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것 이상의 희망이나 욕심은 없다.
처음의 결혼할 때 노후는 서로 반려자라고 생각을 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서로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하얗게 변해가도 아픈 것도 돌봐주면서 늙어가리라 생각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것이 또한 가족이기도 하고.
20 년을 산 남편이고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도 아이의 아빠이고 아낌없이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사랑하고 있으므로 별다른 불만은 없다.
적어도 아이에겐 최고의 아빠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은 늘 고마워하고 있다. 내가 줄 수 없는 아빠의 사랑을 아이에게 준 사람이기에 미워하지도 않는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큼 사랑했고, 예쁜 가정을 꾸몄고, 서로 존중했으며, 잘 살아왔다.
다만, 서로의 지향점이 달랐고, 20년 동안 잘 살아왔으면 결혼은 정말 충분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나의 삶을 살 때가 되었다.
내 피붙이도 각자 타인이 되어 가는 마당에, 아이가 고아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난 가족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라 명명한다.
자식도 예외 일 수는 없다.
가족은 원가족일 때 가족이다.
원가족을 떠나 너나 할 것 없이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다 보면, 부모나 언니 오빠들도 어느 순간 타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도 원가족이 생기고 원가족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손가락도 들쑥날쑥 높이와 길이가 다르듯이, 형제자매도 서로 가진 성공과 실패가 다르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우린 서서히 멀어진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노인요양병원에서 5년간 치료와 연명을 병행하시다 돌아가셨다.
오빠들은 그래도 효자여서 주말을 반납하고 엄마를 찾았고, 딸들인 언니와 나는 엄마가 큰 병원으로 이송할 때마다, 그 일을 도맡아서 해 왔다.
초기엔 늘 병원에서 몇 달을 지내기도 하고 간병인 대신 돌보아 드렸지만, 그것도 나의 원가족이 있으니, 어느새 간병인의 손에 맡겨진다.
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일을 해야 하고 한계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건강은 더 나빠지고, 영특하고 샘이 빨랐던 엄마는 치매 상황에 이르며, 55kg이던 몸무게가 32kg으로 줄어들었다.
무릎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움직이지 못하며 척추뼈는 주저앉았다.
타인의 도움이 있어야만 겨우 식사를 하시다가 마침내 중환자실로 위급한 생의 순간을 몇 번씩 걸치면서 소대변을 받아내고, 콧줄로 연명을 한다.
그렇게 엄마는 돌아가셨고, 큰 일을 치르고 나면 가족은 더 단단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모를 잘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모두가 벗어난 것이고, 이제 다시 그들만의 가족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별 소식 없이 잘 살 기를 바랄 뿐.
나는 나대로 또 다른 문제로 형제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 모두 그렇다.
그 원가족 자체에도 수많은 문제가 있는 것인데, 이미 중년에 들어선 동생의 일이라고 해서 무슨 해결을 해 줄수 있겠는가?
또 조언해서 바뀔 문제였으면 진작에 바뀌었을 태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혼 소식은 이혼한 이후에 모든 것이 정리된 이후에 한참이나 지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좋은 것 같았다.
이혼하기 전부터 하네 마네 하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가족의 걱정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고 모든 쓰나미가 지나간 이후에 천천히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