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차 직장인이 30일 연차를 몰아 쓴 이유
“앞으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어?”
올해 4월, 도쿄 호스텔에서 만난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간만에 말 통하는 사람을 만나 티키타카 대화를 잘하고 있었는데, 순간 멈칫. 3초 후 대답했다. “음 글쎄, 너는?” 비겁하게 말 돌리기 수법을 썼다. 그도 어려운 질문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을 해준 후, 지금 하는 일(개발)을 하며 소소하게 친구들과 취미생활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이후로 나는, 시험장에서 1분 남기고 혼자만 OMR 카드를 다 작성하지 못한 수험생처럼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 돌아온 나는 급기야 연간 알람시계가 되었다. “이번 주가 2분기 절반이 되는 해예요”, “벌써 다음 주면 2분기가 끝나네요.”, “오늘이 6월 마지막 날이에요” 갑자기 알림을 주는 내가 어색했는지 하루는 팀장님이 “라희 대리는 매일 시간을 세고 있나 봐”라고 답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아닌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자꾸 미루고 ‘언젠가 해야지’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주 바쁜 것도 아니었는데. 직장인으로서 정상적인 몸을 운영하기 위해 간신히 운동만 했는데, 그것마저 하나에 정착하지 못하고 종목을 계속 바꿔가면서 했다.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한 때는 음악을 너무 좋아해 커뮤니티를 맡아서 운영도 했던 나였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음악을 찾지 않는다는데, 이렇게 나의 젊음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봤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회사 동료들과 스터디를 하거나, 새로운 북클럽에 가입도 하고, 나를 탐구해 본답시고 50만 원에 달하는 심리검사를 풀패키지로 받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한 나의 일상은 지속됐다. 회사에선 웃는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올해 만 34세 생일을 앞두고 있었고, 내 인생에서의 중간점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냅다 퇴사할 깡도 없었거니와, 그게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퇴근 후 나를 찾아보겠다고 나섰던 다수의 실패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회사로부터 떨어진 기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가 장판 밑에서 숨겨둔 눅눅한 지폐를 꺼내는 것처럼 쌓아온 소중한 연차를 모두 세어보았다. 할렐루야. 40일이었다. 비상상황을 대비해 일부는 남겨두고, 워킹데이 30일로 한 달 반짜리 휴가를 계획했다.
퇴사를 앞둔 사람처럼 조용히 팀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두 달 정도 조율기간을 가졌다. 휴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회사였지만, 한 달 반 연차는 큰 화제가 됐다. ‘우리 회사 대표 MZ가 되겠군’ 생각했는데, 이게 웬 걸. 소문은 생각보다도 빨랐다. 내가 친한 회사 동료들에게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기도 전에 모든 사람이 나에게 휴직하냐고 물어봤다. ‘휴가’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소문을 정정하며, 일을 정돈했다.
"한 달 동안 어디 가?"
회사 동료들은 부러움이 가득 묻은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내가 좋아하면서 경제적으로 부담되지 않는 곳. 너무 새롭지 않아서 지칠 때까지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곳, 나를 완전히 일상과 분리해 줄 수 있는 곳. 새로운 자극이 되어줄 곳. 아무리 생각해도 도쿄였다. 지진과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경보가 해제되고 이틀 후 비행기를 예매했다.
일상생활은 완전히 일시정지다. 회사 다니지 않는 회사원, 일시 무중력 상태로 한 달을 통째로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던 일을 다시 할 힘을 찾는 것. 나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 비장하게 연차 더미를 꺼내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