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만 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 수상 소감이다. 한국인이라면 90년대 홍콩, 일본영화부터 할리우드 영화까지 자막영화를 보는 게 익숙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다양한 언어로 된 영화를 즐기지 않나 보다. 생각해 보면 영화뿐이겠나. 언어를 배우면 다양한 생각을 즐길 수 있다. 언어와 생활은 원 플러스 원 패키지여서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생각의 틀과 방식은 덤으로 이해하게 된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일본어 배우기’를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다. 2018년에 만든 이번 여권에 일본 비자만 5개째인데, 파파고에 의지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끝내고 싶었다. 도쿄 출발 1주일 전, 진정한 ‘P’인 나는 무작정 일본어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외워왔다. 결제해 둔 듀오링고(언어 학습 어플)가 이렇게 실생활에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그날 오후엔 도쿄 일본어 학원에도 등록했다. 한국에도 널린 게 일본어 학원인데 말이다. 사람 앞에서 말문이 좀 막혀봐야 동기부여도 될 것 같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E(외향형 사람)’의 작은 기대도 있었다.
한 달 안에 결제한 8번의 수업을 모두 들어야 하는 탓에 나의 시간표는 첫날에 몰빵 되었다(아쉽게도 두 번의 공휴일이 겹쳤다). 첫날부터 두 개의 수업을 세 시간 연달아 들었더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나는 실실 웃고 있었다. 웃길 정도로 한국어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고, 까막눈이었던 내가 파워 선행학습을 해온 덕에 금세 간판도 몇 글자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세계다. 한글을 떼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드라이브 내내 간판을 읽어대는 것처럼, 수업을 마친 나는 길거리를 다니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읽어댔다. 간판 읽는 속도가 고작 내 걸음 속도도 따라오지 못해서 읽다 말고 지나쳐야 하는 경우도 허다한데도 말이다.
혼네는 뮤지션 혼네(HONNE)만 알았는데, 일본어로 '본 마음'을 말하는 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특징에서 기인한 건데, 진짜 마음은 ‘혼네’, 에두른 표현은 ‘다테마에’라고 한단다.
일본어를 배우면 어떤 세계를 더 배우게 될까. 인치는 우리가 쓰는 단위가 아니니, 한 뼘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하겠다. 파파고 같은 번역기가 1:1 여행통역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세상이지만, 언어를 배운 다는 건 새로운 문화의 문고리를 잡고 여는 일에 가깝다. 내 일본어는 초보 수준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저만치 앞으로 나가 있는 바람에, 나의 도쿄 길잡이가 돼준 이민경 작가의 ‘도쿄 큐레이션’ 책에서 일본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표현을 적어뒀다.
‘코다와리’ 포기할 수 없는 고집. 장인정신 등. p 279
‘테이네이’ 주의 깊게 정중하고 공손하다. 친절하고 깍듯하다. 사람관계 외에도 광범위하게 쓰는 표현! p 395
‘혼네’ 본 마음.
[오늘의 추천]
문화를 사랑하는 작가가 6년 간 도쿄에서 머물며 쓴 준로컬의 시선이라 색다르다. '나도 일본어를 잘했더라면...'이라는 생각에 더욱 불을 지핀 책. 가는 곳마다 좋다고 하는 기행이나 블로그와는 다르게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걸 또 멋과, 맛과, 사람으로 분류해서 집대성했다. 도쿄에 관한 글쓰기를 막 시작한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한 책.
도쿄를 좋아하지만 도쿄의 문화는 아직 잘 모르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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