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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 Oct 27. 2024

그리웠던 ‘언니’라는 호칭

 다양한 언어가 들리는 도쿄 주오구의 한 호스텔 라운지.


맞은편 의자에 누가 봐도 한국인 20대인 친구가 앉았다. 한국인 사이에서 편의점 '잇템'으로 소문난 군것질거리들을 주욱 늘어놓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조각 건넸다.     


사진: entabe.com/50420/pino-scent-brilliant-milk-tea-review


  “Excuse me, do you want one? (혹시 하나 드실래요?)”      

 나는 동문서문(?)으로 냅다 “한국인이시죠?” 했다. 조그맣게 ‘꺄’하는 추임새와 함께 어쩐지 말을 걸고 싶더라고 화답해 줬는데,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한국인 만나는 걸 비선호(라고 하겠다)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회생활을 하게 돼서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대화에 참전했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J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데 좀 심심하다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크게 너스레를 떨 수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2박 3일 간 시바코엔이나 아사쿠사를 비롯, 거리를 막론하고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역시 20대 체력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시부야로 간다는 말에 살짝 신이 나 요요기 주변 카페를 공유했다. 내가 저녁을 먹으러 일어나려 하자, J는 이미 늦점을 먹어 아쉽다고 미리 미안해하더니, 밤에 지하 라운지에서 만나자는 기약을 했다.     


 시내로 나가 유명한 카이센동 집에 줄을 서서 푸짐하게 먹고 돌아왔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기다린다는 사실이 내 걸음을 조금 들뜨게 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말해줄 참이었다. 평소에 나는 편의점에 자주 가지 않지만, 오늘은 돌아가는 길에 로손(일본의 유명 편의점 프랜차이즈)에 들렀다. 좀 덜 유명한 바닐라 요거트를 3개 들입으로 사며, 내일 아침으로 꼭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직 모르는 아이템이길 은근히 바라며.


 밤 10시쯤 라운지에 들어갔을까. 혼자 진토닉을 홀짝거리며 DJ와 소소한 얘기를 하며 기다렸는데, 시간은 어느덧 11시 15분을 넘어갔다. 바는 12시에 닫는다. J는 어쩌면 호스텔 라운지에서 더 재밌는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쉽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겠거니 스스로를 달랬다.


나도 이 잔만 비우고 방으로 올라가야지.     



 내 진토닉 잔에 두 모금쯤 남았을 때, 뽀짝한 표정을 하고 그녀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옷 갈아입은 나를 못 알아봤는지 나에게 한국어로 대뜸 “혹시 한국인 언니 보셨어요?”란다. ㅋㅋㅋㅋ 할 말을 잃어 고장 난 상태로 “어?”했더니 “어머 언니!”하고 소리쳐 순간 이목이 집중됐다.


 언제 봤다고 언니래. 웃기고 귀여워서 한참 웃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하고 그제야 덧붙이며, 날 못 알아본 게 조금 머쓱했는지 내가 어려 보여서 그랬다며 내가 생각하기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칭찬을 해줬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된 나는 좀 무안했지만, J가 마냥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기분은 좋았다.    


 언니라니. 오랜만이다. 회사원 9년 차인 나에게 누구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라희 대리님이라고 하지. 밖에서 만나도 우리 어른들은 ‘라희 님’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라희는 내 본명이 아니다) 언니라는 호칭은 나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나를 20대로 데려가 주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그 자리에서 ‘라희 언니’하고 친근하게 불러주던 그 시절로. 스쳐 지나가던 인연도 금방 언니-동생 하던 시절로.




 여느 호스텔이 그렇듯 사람들이 합류하더니 한국식 술 게임과 되지도 않는 영어 대화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요거트는 아침에 줘야지. 생각하는데, 술에 잔뜩 취한 요상한 놈 하나가 들어와 분위기를 흐렸다. 나는 J에게 눈짓하고 일어나려 하니, 그녀도 따라 나왔다. 어렵사리 J와 재회해 반가워했는데 나는 J와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살짝 취한 채 방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다.  


 술이 깨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 '언니'라고 불러준 덕에 내 '동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아 그냥 둘이 좀 더 얘기할걸. '언니 노릇'을 못했다. 인스타건 카톡이건 아무것도 나누지 않은 걸 알게 됐다. 아침이라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안내 데스크로 찾아갔다. 혹시 4층에 머무는 J가 체크아웃했냐고.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와 정신없어 보이던 직원은 몇 초 검색해 보는가 하더니, 모른다고 했다. 아, 거 좀 제대로 봐주지. 로비를 좀 어슬렁 거리다, 또 4층 복도를 좀 어슬렁거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도록 J는 보이지 않았다.     


 ㅡ 아, 요거트 줘야 하는데.          



이미지: https://backpackersjapan.co.jp/citan/img/top_hostel1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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