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제동장치에 걸려 동력을 잃은 자의 고백
개인실을 쓰는 에어비앤비 생활이 조금 지겨워지려던 찰나, 빨래를 돌리고 있던 옆방 친구 B가 말을 걸어왔다. 친구라기보단, 호주에서 온 차장님 정도? 어디서 왔냐, 어느 레스토랑이 맛있었냐 같은 흔한 여행 얘기를 하다 서로 추천 장소를 공유하기 위해 왓츠앱(비아시아 국가의 카톡)을 주고받았다. 보통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만나면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하는 게 일반적인데, 전 국민이 미라클 모닝인 호주 사람답게 다음 날 모닝 마차나 한잔하자고 했다. “오케-”
오전 8시 댓바람부터 요요기의 한 카페에 갔다. 마차이길 흉내 내는 가게가 아닌, 마차를 휘스크로 제대로 저어 내주는 가게였다. 내가 30대고 그는 40대라는 점, 한국에선 쉽지 않은 일인데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한 달간 휴가를 냈다는 얘기 같은 걸 했다. 그는 IT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것 같았다. 개발자에서 사업기획으로, 다른 조직에서 컨설턴트로 더 많은 사업들을 다뤄봤단다.
알고 보니 그의 여행은 절반은 관광, 절반은 비즈니스였다. 그는 호주에 마차를 수입, 유통하려고 생산자들을 만나러 교토에 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의 계획이나 목표에 태클을 건다. 시장조사는 했냐, 그게 되겠냐, 지금 하는 게 더 낫지 않냐. 걱정은 걱정대로 받되, 그는 목표가 있다고 했다. 새로운 마차 문화, 웰니스를 호주로 가져가고 싶다는 비전 같은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 얘기를 하는 순간 그의 톤도 살짝 모드전환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자긴 그냥 움직이기로 했단다. 움직이다 보면 기회가 생기고, 시장조사는 당연히 하게 될 텐데, ‘아 시장조사를 해야지’하고 그냥 6개월을 지나 보낸 후에, ‘아 시장조사를 아직 못해서’라고 탓하는 상황이 오는 걸 스스로 가장 경계한다고 덧붙였다. 뜨끔했다. 그 말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 같아서. 고백컨데, 요 직전까지의 나는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가상각 연수를 다 채운 배터리처럼 나는 한걸음 한걸음이 느려져갔다. 마치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없는 것처럼. 지난 3년 간 나는 ‘좋겠다’ 무새였다. 뭐 하면 좋겠다, 뭐 해서 좋겠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던 나는 여러 분야에 기웃거렸는데, 셀프 제동장치에 걸려 무력하게 멈춰있었다. 재능이 없다든지, 시간이 없다든지, 전공이 아니라든지, 충분히 젊지 않다는 이유 같은 것들을 대며 ‘안 하기를 선택’했다. 습관에는 가속도와 관성이 붙는다. 몇 번 그런 결정을 하다 보면 어느덧 불편함도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 보면 금세 미루기 달인이 된다. 되는 대로 ‘진행시켜’하던 나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충만하던 배터리는 누가 다 써먹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