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있다. 겨울 끝자락에, 햇빛이 비추는 날이면 빨리 봄이 온 것 같아서 옷을 얇게 입고 나가는 날. 기분 탓인지 분명 따뜻해 보였는데, 역시나 실수인 그런 날씨, 나의 착각이 웃기고 슬픈 날. 그래서 햇빛이 있는 날은 처음부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비는 반대다. 눈꺼풀을 들지 않아도 밖은 회색 빛일 거고, 젖어 있겠다 싶은 아침이 있다. 축축함이 등 아래로 스민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바쁘다. 곧게 질주하다가 어딘가에 닿는 소리가 흐르지 않고, 공중에서 깨져 버리기도 한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늘 우산을 챙겨야겠다, 싶어도 지붕 밖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가면 갑자기 고요해진다. 그러니까 언제나 빗소리는 무엇인가와 닿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소리가 열리면, 그 안에 흐르는 것이 생겨난다.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리듬이 있다. 누구는 커피잔을 들 때도 아주 고상하게 팔을 움직이고, 누구는 늘 빠르게 걷고, 또 다른 사람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춤을 춘다. 빗소리도 자기만의 연주에 변주 형식으로 다양한 사물과 인사를 한다. 이때 만들어지는 리듬을 가만히 들어보면 가끔은 아주 동일하게 들리기도, 또 가끔은 일정한 규칙 없이 막무가내다. 어떤 때는 낭떠러지 위에서 쏟아지는 폭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다. 시끄러움과 고요함 말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 수많은 리듬의 단어들. 소리를 타고 고유한 질서가 말을 한다.
비가 어떤 사물과 닿을 때 내는 소란에 귀를 연다. 여기에 스며든 작은 리듬의 음과 쉼이 나는 참 좋다. 그래서 난 리듬감이 없어도, 그래서 삶이 엇박자라도, 비록 처음의 목적지를 자주 잃어버려도 나는 내 안에서 작은 질서를 갖춘 세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