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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팔로어와 퍼스트 무버

이제는 시간이 없다

by THERISINGSUN Mar 04. 2025

아마도 피크 코리아(Peak Korea)는 지난 것 같다. 확실하다. 돌이켜보면 2010년 전후였을 것이다. 이후 설마설마하면서, 혹시나 하면서 기다렸던 시간이 10년쯤 흘렀다. 우리 경제는 196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IMF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다시 성장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반세기 만의 세계 10위권 선진국, 역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빨랐던 국가부도 위기 극복 경험이, 이번에도 이겨낼 것,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했던 것인데, 이대로라면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세기 만에 이룬 유일무이한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 민족은 지능이 높다고 한다. 눈썰미도 좋고 손재주도 좋다. 그리고 뭐든 빨리빨리 한다. 국가적 목표가 한번 설정되면 온 국민이 앞뒤를 따지지 않고 전력질주한다. 워낙 밑바닥에서 시작했던 기저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IMF 외환위기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겨내고, 또다시 일어나서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을까. 그건 분명 국가적 위기였지만 일종의 독감 같은 거였다. 심하게 앓았지만 워낙 체력이 튼튼하다 보니 금방 털고 일어난 것이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전자, 제철, 화학, 기계 등 펀더멘탈이 단하고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꺾였지만 바로 반등이 가능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나로 똘똘 뭉치는 저력도 여전히 한몫을 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급하고 화끈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기존 산업에만 의존하며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산업을 키우지도 않았다. 향후 10년간 성장률을 올릴 신산업은 없다. 게다가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생산가능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출산율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최저 수준인데 인력시장을 해외에 개방하지도 않고 있다. 소비가 위축되면서 내수시장도 쪼그라들고 있다. 수출로 경제를 견인할 기술도 없고, 내수도 무너지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 10%에 육박했던 경제성장률은 2000년 전후 5%대에서 2010년 전후 3%대로 내려앉았고 2020년 전후 2%대를 찍은 이후 최근 1%대로 떨어졌다. 지금의 상황은 마치 ‘곶감 빼먹듯 한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와 같다. 애써 모아둔 재산을 조금씩 써 없애는 것이고, 앞일은 생각하지 않고 당장 좋은 것만 취하는 것이다. 앞으로 먹을 곶감을 더 생산하지 않고 기존에 만들어 둔 곶감만 빼먹다 보면, 곶감은 이내 다 떨어지고 창고는 텅 비게 될 것이다.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로 만들어준 우리의 특징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되기에는 탁월하지만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는 아니다. 빨리 뒤따라가는 자는 처음 움직이는 자가 될 수 없다. ‘빨리’와 ‘처음’은 그 성질이 전혀 달라 서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고 그걸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고, 그래서 그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아주 근본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아주 오랫동안 연구와 실험을 하고, 그리고 검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본이 25회 수상한 과학분야 노벨상, 8회 수상한 프리츠커상이 우리에게 한 번도 없는 이유다. 일본은 뭐든 근원에 이르기 위해 아주 깊게 파고든다. 또한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아주 오랫동안 이어간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유이고, 앞으로 더 많아지고 확대될 것이다. 급하고 화끈하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는 빨리 뛰는 단거리 선수는 될 수 있지만, 제일 깊은 곳, 제일 먼 곳까지 아주 오래 달리는 장거리 선수는 될 수 없다.


우리는 반도체로 일본에 완승한 경험이 있고, 가끔 축구로 일본을 이긴다. 반도체는 우리의 패스트 팔로어 역량이 폭발한 결과다. 눈앞의 리스크에 아랑곳하지 않는 담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을 가진 탁월한 지도자가 그 역량에 불을 댕겼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반도체는 우리가 발명하지 않았다. 단지 빨리 따라붙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반도체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우리 축구는 전략적 투자 없이 요행을 바라고 구조적 한계를 특출한 선수로 가리고 결과가 안 좋으면 희생양을 찾는 방식으로 일관해 왔다. 일본의 깊은 뿌리와 오랜 투자는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체계적인 엘리트 스포츠 정책으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일본을 더는 요행이나 특출한 선수로 이길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앞서 ‘경쟁력’에서도 밝혔듯이, 진정한 경쟁력은 두 가지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남이 따라 할 수 없어야 하고, 둘째 지속이 가능해야 한다. 남이 만든 것을 빠르게 뒤따라갈 뿐인 패스트 팔로어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패스트 팔로어도, 앞서가는 수많은 자들 중에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를 적기에 판단하는 리더가 있고, 그의 결정을 하나로 뭉쳐 뒷받침할 에너지가 있을 때라야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선구안을 가진 리더가 보이지 않고, 그간 비축해 둔 에너지도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코리아가 세계 10위권에서 피크를 찍고 지금 하산하고 있는 이유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이미 늦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퍼스트 무버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간 패스트 팔로어가 되어 빨리 뛰는데 집중하느라, 근원, 근본 같은 것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뿌리는 약하다. 급하게 비료 주고 영양주사 놔서 그럭저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지만, 바람이 불고 땅이 흔들리면 바로 넘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피우고 맺은 꽃과 열매가 아니다.


아직 비축해 둔 에너지가 다 소진되지 않았다. 기회가 남아있을 때, 기초과학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의대로 쏠리는 우리의 이공계 고급 두뇌들이 기초과학에서 더 밝은 미래와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게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기초과학은 당장 부와 명예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시장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반드시 정부가 나서야 한다. 초중고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모든 과정을 퍼스트 무버에 필요한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과학뿐만이 아니다. 케이팝, 케이드라마, 케이클래식, 케이웹툰, 케이게임, 케이뷰티, 케이푸드, 케이관광까지. 세계인들의 환호가 당장 눈에 보이는 꽃과 열매의 화려함에 끌려 반짝하는 일시적 현상은 아닌지, 과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지속이 가능한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우리 사회 전체가, 모든 분야가 퍼스트 무버가 되도록 더 늦기 전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시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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