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하고 기억할 만한 어떤 것들
휴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가 CBS FM 라디오 음악을 들었다. 언젠가부터 주말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는 날이면 혼자서 조용히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사색하고 글도 쓰며 모닝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운동이 없는 주말이면 나름 혼자만이 소소하게 누리는 행복의 시간이 되었다.
아침 방송이라 그런지 진행자들도 조용하게 내레이션을 해서 차분하면서도 휴일 아침의 고요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결혼할 때부터 나와 시차가 두세 시간 차이나는 아내가 거실에 나올 때쯤이면 이미 새로운 음악프로그램으로 바뀌어 클래식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뒤늦게 거실에 나온 아내가 드립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고 난 후 책장에서 오래된 CD를 찾아와서 라디오 노래를 멈춘 후 노래 한곡을 틀어주며 이 노래를 기억하느냐고 물어본다. 노래는 7080 스타일의 창법으로 매우 귀에 익은 노랜데 누구 노래인지 제목이 생각이 안 난다고 했더니 더 들어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 집으로 와’(장철웅, 1991)라는 노래였다. 결국 노래 제목을 맞추진 못했지만 아내는 연이어 옴니버스 앨범 중에서 다른 가수의 노래를 하나 더 틀어주고는 그렇게 휴일 아침의 음악 감상은 끝이 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우리 집으로 와, 집들이라는 용어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오래전엔 결혼을 한다든지, 이사를 가든 승진, 돌 백일잔치 등 집들이를 할 명분은 생활 속에서 차고 넘쳤다.
실제로 그 명분에 따라 집들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또한 그때의 주부들도 그 대단한 수고를 마다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절대 아님은 물론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큰 민폐였다. 그때 그 시절의 치열한 삶을 함께 살아낸 이 땅의 모든 아내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하고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마도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맞벌이 등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면서 자연스레 생활 속의 비효율적인 허례허식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일이라든지 기념일도 모두 집 밖에서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고 사실 더 편하고 좋다. 최근 어버이날 우연히 유명 맛집 옆에 있는 슈퍼에 장을 보러 갔다가 유명 맛집에 몰려온 차로 인해 주차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세상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했고 이젠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고 단지 추억할 뿐이다. 한편으로 보면 지금은 아내가 좋아했던 그 노래 ‘우리 집으로 와’는 그렇게 시대적 흐름에 공감받지 못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아낸 우리에게는 추억의 선물이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소리와 냄새 그리고 어떤 장소와 느낌으로부터 시작하고 기억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중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함께 듣던 노래, 그 또는 그녀에게서 익숙해진 체취, 그리고 함께 갔던 장소와 어떤 느낌들을 우리는 평생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그가 너무나 기다리고 그리워하던 내일이었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치열하게 오늘을 잘 살아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회사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문득 바람이 불러오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떠오르는 이름 하나는 있어야 인생입니다.’ 함께 오래 생활하고 해외 출장도 같이 많이 다니긴 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만큼 그 후배가 멋져 보였던 순간은 없었다.
그 회사 후배에게 오래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고 말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닌, 삶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들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습이 된다. 우리들의 삶이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인생은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난날을 추억하는 시간여행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