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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y 07. 2020

엄마가 너 도와줄게, 너 하고 싶은 거 해

슈퍼우먼 신드롬


  나는 가끔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대학시절에는 군대 가기 싫어서 여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군대도 안 가고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의 첫 관문은 이 땅에서 군대를 다녀오는 문제가 제일 큰 일이다. 오죽하면 선거 때마다 자식의 군대 문제나 후보자 스스로의 군필, 미필의 문제는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고, 한때 잘 나가던 어느 연예인은 군대를 반드시 가겠다고 선언하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십 년이 훨씬 넘게 이 나라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군대 생활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꼰대들은 그 단적인 예로 군대에서도 여름에 에어컨을 틀 수 있고 겨울엔 조개탄이 아닌 보일러를 사용하고 뜨거운 물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군대 생활은 너무 편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군대 생활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다는 걸 아느건지 모르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도 남자들은 동창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많은 MSG를 첨가해 말하곤 한다. 어찌했건 그래도 군대는 군대다. 군대는 학교가 아니다.


출처, 인터넷 이미지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독박 육아, 독박 생계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대부분의 가정이 부부가 맞벌이를 하거나 싱글맘 혼자 모든 걸 감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은 세련되고 센스 있는 남자들 대부분이 육아나 가사노동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직도 가정에서 세습되어 내려온 마초적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일반적으로 경험한 요즘 젊은 남성들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도와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분담해서 하는 경우를 때때로 보아왔다.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몇 년 전 우연히 ‘82년생 김지영’ 이란 소설을 읽고 내용이 괜찮다 싶어 사십 대를 치열하게 살고 있는 회사 내 남성 팀장들 한테  의도를 가지고 선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그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물어보나 마나 해 특별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작년 가을쯤에 그 소설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했다. 영화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개봉 첫날에 가서 보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정유미, 공유 배우가 주인공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끔 주위를 둘러보면 여성들은 많이 공감하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감정이입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물론 그 영화의 개봉 이후 평점 테러 등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댓글은 “일 년에 명절 서너 번 밥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냐, 나는 군대 와서 매일 삼시세끼 천명씩 밥을 하고 있다.” 뭐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런 현실이 그냥 서글펐다.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우리는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은 모든 환경과 여건이 다 바뀌었다는 뜻이다. 각자가 겪고 있는 특수한 환경이나 특수한 사정 말고, 보편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을 일러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각각의 경우를 맞고 틀리다로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은 남자들 대로 살기가 너무 팍팍하다. 오래전 독박 생계, 독박 육아할 때가 좋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독박 육아 때와는 달리 임신, 출산을 제외한 육아, 교육, 가사노동까지 분담해서 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어디에서건 남녀의 문제를 꺼내면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청춘들은 모두 아프니까.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아무튼 지금 여성들의 삶은 독박 육아 시대와는 또 다른 이유들로 너무 팍팍해졌다. 임신, 출산, 육아, 교육, 회사, 일까지 하나 만만한 환경이 아닌데, 그냥 시대가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 한마디로 아직도 우리 주변의 맞벌이 부부나 싱글맘 가정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변화하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녀들을 또 다른 험지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가 안타까운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영화에서처럼 요즘 젊은 여성들이 옷도 잘 입고, 스타벅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마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를 보고 그들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 그들의 패션이나 입맛은 그냥 그저 그들의 taste와 style 일 뿐이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게 옳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취향이고 기호일 뿐인 것처럼.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저출산이나 비혼이 심심찮게 요즘 사회적 이슈의 화두가 될 때가 많다. 그들이 아기를 안 낳고 싶어서 안 낳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 즉,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매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누군가의 그녀들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생활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고도 결혼하고 아기를 낳는 그녀들이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애국자라 해야 하나 모를 지경이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 줘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 나라에 슈퍼우먼은 없다. 슈퍼우먼 신드롬은 허상일 뿐이다. 실제로 현실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딸, 그녀들의 엄마, 그녀들의 할머니, 모든 이 땅의 여성들이 국가의 미흡한 제도나 시스템을 대신해 그 고단한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짊어지고 살고 있다. 오십, 육십 대가 되어도, 아니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변해도 그녀들의 삶은 늘 희생을 강요받고 고단할 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82년생 김지영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오롯이 감당해 내고 있는 이 시대의 전업주부들이야 말로 진정한 슈퍼우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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