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정의 FM라디오, 어느덧 마칠 시간이네요. 이제 마지막 한 곡만 남겨두고 있는데요, 한때 제가 정말 많이 들었던 곡인데 괜히 오늘은 꼭 듣고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가수 헤이즈 양의 『비도 오고 그래서 』란 노래입니다. 오늘은 오프닝부터 어린 소년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돼 마음이 무겁네요. 하늘도 슬픈지 빗방울도 점점 굵어지는 것 같고요.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생각만 자꾸 듭니다. 이런 어른밖에 안 돼서 너무 미안하네요. 좁은 구급차에서 고통스럽게 사그라들어야 했던 가련한 생명의 불꽃의 명복을 빕니다. 저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꼭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아니, 하늘이 아니고 땅으로 빌어야지. 천국은 니들 땅 아래 있다고. 왜 인간들은 천국이 당연히 하늘에 있다고 생각할까? 그나저나 나중에 저 아이나 좀 찾아볼까? 가련한 혼이니 잠시라도 이곳 천국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텐데.'
아기 천사 <예꼬>의 머리 위 자그마한 빛의 고리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천사 <예랑>의 귀에 라디오 진행자의 슬픔이 짙게 묻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천사답게 계속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인간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천사임에도, 저 잘난 라디오 하나 끄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손가락 까딱 한번 하면 끌 텐데.
"그나저나 저 망할 라디오. 저딴걸 왜 계속 틀어나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그 잘나신 <해주신>님은 또 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인간계 라디오를 항상 틀어 두라고? 왜 이런 망할 법칙을 만들어놔서는. 정작 자기는 맨날 쏘다니느라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병원 우중충한 이런 분위기에 저런 우울한 라디오가 말이 되냔 말이지.'
천사 <예랑>은 들려오는 병원 구석 라디오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눈살을 찌푸린다. 예랑의 품 속 <예꼬>가 쌕쌕 거친 숨소리를 간신히 이어가며 자고 있다. 머리 위에 떠있는 빛의 링 고리가 많이 희미해졌다. 몸이 많이 안 좋다는 뜻이다.
올해 생일날, 자신의 본모습인 눈동자가 스무 개가 된 게 좋은지 방긋 함박웃음 짓던 예꼬의 모습이 스쳐간다. 늘 밝던 아기가 하루밤새 갑자기 왜 이렇게 아픈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것도 모르다니. 다 큰 자신도 완벽하진 않다는 걸, 아기를 키우면서 매 순간 깨닫게 된다.
지금 예랑의 보이는 모습은 비록 인간의 형태이지만, 사실 천사는 수십수천 개의 눈동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본모습이다.
그리고 인간이 죽어 천사를 마주하는 첫 순간, 인간은 그 눈동자로 가득 찬 천사를 보게 된다. 그것도 눈앞에 있는 인간의 생전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듯 각기 다른 방향으로 쉼 없이 움직여대는 눈동자 수십수천 개의 천사를.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죽은 인간은 당황하고 놀란다. 자신의 생전 듣고 보고 배웠던, 그렇게 자기들 멋대로 상상해 댄 천사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그 모습이 천사는커녕,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생각하더라. 망할. 천사라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들어처먹질 않고 꼭 기절하거나, 기절하지 않으면 한다는 소리가 뭐?
“악마님.. 저는 지옥 갈 만큼 잘못한 게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죽은 인간은 이딴 소리를 지껄인다. 참나.
그럼 인간을 위해 지금처럼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면 되지 않냐고?
역시 인간답게 이기적이네.
안된다.
예랑도 그렇게 해보려고 했다. 한낱 인간에게 징그러운 취급당하는 게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근데 안되더라. 이 세상의 현재 가장 강하고 위대하다는 <해주신>의 이전 신인 <태초신>이 만든 법칙이라 지금 이 세상 어떤 존재도 그 법칙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별 이상한 법칙을 만들어 놓는 걸 보니 그 태초신이란 작자도 지금의 해주신 만큼이나 이상한 성격이었을 게 분명하다.
아무튼 예꼬의 본모습인 스무 개의 눈은 이곳 천국의 시간으로는 200년, 인간계의 시간으로 치면 20개월 정도 된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간신히 인간, 아기의 형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천사는 보통 자신의 본모습인 눈동자가 아닌 예랑처럼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거나, 강아지나 고양이 등으로도 바꿔서 생활할 수 있다.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데, 대부분 잘 바꿔지는 걸로 선택하는 것 같다. 예랑은 인간이 편해서 인간으로 하고 있다. 예꼬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예랑은 아기를 처음 탄생 시키고 이름을 뭐라 지어줄까 고민했다.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이름이란 게 필요하지 않았던 예랑이었기에 이름을 짓는다는 게 생소했다. 어떻게 할까 한동안 고민하던 예랑의 머릿속에 어릴 적 자신이 불렸던 예랑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예'라는 글자가 괜히 끌려 그 글자를 살려, 자신의 아기천사의 이름을 처음에는 <예고>라고 지었다. 그런데 아직 아기 형상을 하고 있으니, 인간계에서 귀여운 아이를 향해 <꼬마>라고 부르던 게 생각나 <예꼬>라고 부르고 있다. 귀엽다. 자신의 400개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앞서도 말했든 사실 이곳 천국에서는 딱히 천사들을 지칭할 이름 따위는 필요치가 않다. 서로 완전히 독립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고, 인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완벽한 능력을 갖고 있는 천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과 달리 서로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다. 아, 물론 이렇게 빛을 잃어가게 된 특별한 상황에서는 다른 천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긴 하다. 인간계에서는 그들을 의사, 간호사라 부른다. 하지만 이곳에 저들은 역시나 이름이 없는 천사일 뿐이기에 예랑은 그냥 의사천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딱히 부를 이름이 없다.
아, 물론 그들이 의사 천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세 신인 <해주신><높으신><어르신> 님들만큼의 강력한 신성은 당연히 없다. 그냥 빛을 예랑 같은 보통의 천사들보다 조금 잘 다루고, 그래서 빛을 조절해서 줄 수 있는 정도일 거다.
이렇게 이름이 필요 없는 천사들이지만, 딱 한 가지 예외로, 이름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바로 예랑과 아기 예꼬와 같이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기천사를 탄생시켜 키우게 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기인 예꼬도 점점 성장하면서 예랑을 부를 호칭이 필요할 것이고.
예랑은 인간계처럼 그냥 아빠 혹은 엄마라고 지을까도 생각해 봤다. 근데 관뒀다. 너무 흔해서. 주변에 자신처럼 아기 천사를 키우는 천사 대부분이 그 호칭을 사용한다. 아, 물론 천사는 성별이 따로 없어 둘 중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선택해서 쓴다. 하지만 예랑은 다른 천사들과 다를 바 없는 호칭으로 예꼬에게 불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특별한 존재에게 흔한 천사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예랑도 예꼬에게 특별한 천사로 남고 싶었다. 예꼬가 자신에게 너무도 특별한 존재이듯이.
'그나저나... 천국도 가만 보면 인간계와 비슷한 점이 은근히 많은 것 같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참…‘
쌕쌕 잠들어있는 예꼬의 감긴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예랑은 생각한다. 예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천사가 되기 위해선 4번 인간계에서 환생해 선행을 4번 모두 주어진 시간 안에 쌓아야지만 가능하다는 이야기. 4번의 환생은 인간일 수도 동물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예랑 자신조차 천사로서의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환생 그때의 기억은 없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당연히 그렇다고 알고 있다. 사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콜록콜록! 컥컥 컹컹"
예꼬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기침을 쏟아낸다. 마치 인간계의 개가 짖는 소리 같다. 당장이라도 작은 입으로 새빨간 빛을 쏟아낼 것 같다. 아, 인간은 피를 토하지만, 빛으로 이루어진 천사는 당연히 빛을 토해 낸다. 물론 왜인지 인간의 그것과 같은 빨간색 이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왜 인간과 천사가 이토록 닮아 있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예랑은 자신의 품에 있던 예꼬를 바로 세워 자신의 품에 끌어 안아 등을 토닥여준다. 이렇게 하면 기침이 조금 줄어들 거라는 걸, 어째서 인지 예랑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어렸을 적 그랬던 적이 있는 걸까. 물론 잘 기억나진 않는다. 다행히 예꼬의 기침이 잦아든다.
예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다. 예랑은 병원에 앉아 있다. 이름도 꽤나 거창한 삼신 천사 병원. 이름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당연히 삼신 할매로 유명한 그 삼신의 병원 중 한 곳이다.
옛날 천사가 없었던 시절에는 이곳은 신들을 위한 병원으로, 이 넓은 천국에 삼신이 직접 신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딱 한 곳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던 신들이 한순간에 정리되고, 예랑과 같은 천사들이 생기고 나서, 아니, 지금 예꼬처럼 천사들이 "병"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애로운 삼신이 그 병원 숫자를 최대한 늘려 천사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들은 없다.
당연히 삼신도 없다.
예전에는 신들이 지금의 천사만큼이나 많았다고 하지만 이곳 천국에는 더 이상 신이 없다. 딱 세 명의 신만 남았다. 저 더러운 지옥은 <어르신>님, 예랑이 있는 여기 천국의 신은 <높으신>님, 그리고 그 위에 <해주신>님. <해주신>님은 두 세계와 인간계도 같이 다스리신다고 하는데, 이상한 소문만 무성할 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천사인 나도 본 적이 없다. 그 신은 왜인지 삼신만 독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주변 다른 천사 누구도 그의 실체를 모른다.
'있다면 지금 당장 멱살을 잡아끌어다 이 병원에 있는 풍경이라도 보여주고 싶군. 얼마나 잘 다스렸으면 이렇게 많은 천사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고꾸라져 저렇게 당장이라도 소멸할 것처럼 빛의 고리가 흐려지고 있냔 말이지. 쯧!'
예랑의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 위에 떠있는 2개의 빛의 고리가 잠시 조금 붉게 물들었다 금세 원래의 새하얀 빛을 되찾는다.
천사도 화가 난다. 물론,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만. 그리고 지옥의 망할 것들에 비할 것도 못 되는 귀여운 정도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던 예랑에게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온다. 새벽부터 이 잘난 삼신 병원에 오기 위해 오픈런했다. 인간계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침 9시에 문을 여는데 새벽 3시에 왔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때 병원 문 앞에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더 기가 막힌 건, 예꼬와 같은 아기 천사를 위한 병원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대책도 없다.
아, 물론 이곳 천국에는 이런 삼신 전문 병원의 상급 병원 개념인, <대천사 응급 권역 센터>라는 게 총 3개가 있다. 소멸 직전의 정말 위급한 천사들이 가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방대한 천국에 단 세 곳이라니. 다행히도 예랑의 거점 가까이에 빛광년으로 조금만 힘줘 날아가면 쉬이 도달할 수 있는 권역 센터가 하나 있긴 하다. 어제 새벽 예꼬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그곳으로 가려고 <천사폰>으로 정보를 찾아봤다. 하지만 쉬는 날이란다. 짜증 나는 건 다 정상 진료를 보는데, 아기 천사 담당만 쉰단다. 아기 천사를 볼 의사 천사가 모자라다나. 그래서 인간계 시간으로 따지자면 일주일에 두 번 쉬는데, 딱 그날에 걸려버렸다. 그 쉬는 날 걸리면 꼼짝없이 큰 일이라도 날 텐데, 아기 천사들이 불쌍하다. 이러니 누가 아기 천사를 탄생시키려 하겠나. 참.
그렇게 결국 다시 빛광년으로 쏜살같이 날아 이곳 삼신 병원에 와서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다.
예랑이 자세를 고쳐 예꼬를 품에 안는다. 예꼬를 낫게 하기 위해선 빛이 필요하다. 선한 영혼에게서 나오는 빛이. 하지만 예랑은 안다. 그런 빛은 더 이상 찾기 불가능하고, 찾는다 해도 자기 몫으로 떨어질 선한 빛은 없다는 걸.
눈을 들어 화면에 표시된 자신의 순번을 확인한다. 자신의 앞에 43명이 천사가 대기하고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기가 막힌다. 이 삼신 병원은 천국 곳곳에 있다고 하는데 이 모양이다. 이곳엔 천사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 천사도 단 둘 뿐이다. 그마저도 치료를 잘한다는 한 명에게 몰려 그 인기 의사에게는 40명이, 다른 의사에게는 달랑 3명뿐이다. 그리고 예랑도 당연히 잘한다는 그 40명 중 한 명에 줄 섰다.
'뭐.. 본 적은 없지만, 달랑 3명만 대기 중인 인기 없는 의사보단, 40명이나 기다리는 의사가 더 잘 치료한다는 뜻이겠지? 우리 예꼬를 인기 없는 아무 의사한테나 맞길 순 없어. 좀 기다리더라도 확실히 빛을 받아야지. 하! 근데 이게 맞나, 정말? 어쩌다 그 좋다는 천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