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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Jun 26. 2024

Ep25. 통곡의 벽




‘정말 너무 죽고 싶었는데... 정말 너무 죽을 수가 없었어...’

그녀의 왼쪽 가슴에 기다란 두 줄기 꼬리의 노란 리본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달린 주황색 명찰이 반짝인다. 매일 죽기만 바랐던 그녀였기에 이제 뭘 하다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다는 독기만 남았다.

사람이 계획해도 이루는 건 신이라 했던가.

죽음을 그렇게 바랐더니, 그녀의 신은 오히려 그녀에게 죽지 못할 이유를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날 그녀의 눈앞에서 자신만 살아서 죄송하다고 눈물짓던 앳된 여학생과 그 아이가 건네준 딸의 작은 명찰이 신의 대답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의 대답이 명확하게 보이자, 그녀는 생각을 포기했다. 한낱 인간의 생각이 신의 대답에 닿을 길이 없는 것임을, 그녀는 그때 깨달았다. 그저, 네모 각진 주황색 명찰만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히도록 움켜쥐고 하루를, 그렇게 매일을 견딜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그다음의 하루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도 딸과 남편의 곁에 가 닿을 날이 오겠지 하는 기약 없는 아쉬움만 마음속에 깊게 묻은 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참석했다. 결국 남편이 하던 위원회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슬프게도 남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어 버렸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살아서 그렇게 가까이 있을 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그 사람이 죽어 다신 볼 수 없게 되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미 늦어야만 이해가 시작되는 아이러니라니.

 

위원회 남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전부인, 절망 가득한 사건에 대해 관심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그녀의 그것과는 정 반대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절망 속 사건에 여전히 갇혀있는 이들을 향한 욕설로 관심을 전했다.


“진짜 이기적이네.”

“그만큼 돈 받아쳐먹었으면 그만 좀 해라.”

“아 지긋지긋하네. 뭐 어디까지 해달라고?”

“자식 목숨 팔아서 돈벌이하는 것들.”

“부모가 그 모양이니 오히려 잘 죽은 거 아님? 그 부모 밑에서 커봤자 노답임ㅋㅋ”


욕과 조롱.

그것만이 남았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눈엔 조롱과 욕으로 휘감아진 화살들이 계속해서 날아와 박히고 또 박혔다.


‘세상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나쁠까. 아니, 인간은 왜 이렇게 악할까. 이렇게 묻고 또 물으면 신은 또 내게 무슨 답을 할까?’

그녀가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한 핏빛의 욕과 조롱만 남을 뿐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매일을 견디던 남편이 왜 그렇게 세상을 버렸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어떻게 본인들도 자식 키우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돈 받았으니까 그만하라고 할 수 있는지. 본인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정녕 알고 떠들어대는 건지.

모르는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문제고,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면 그건 더 최악이었다.

자신이 신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남의 눈동자에 핏빛 머금은 화살을 쏴대는 이들에게 당장에 벌을 내렸을 텐데, 왜인지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늘 그랬듯.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이 한순간에 그렇게 죽었는데... 부모가 울부짖는 게 왜 이기적이야? 이쪽에서 우리 목소리를 안 들어주길래, 그런데 저쪽에서 우리 목소리를 그나마 들어주기에 그쪽에 이야기했다고 그게 잘못된 거야? 니들은 애 없어? 니들은 부모도 없어? 니들 자식이 그렇게 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니들은 애 안 낳을 거라고? 니 자식들은 그런 일 안 겪었으니 상관없다고? 그래, 이런 세상에 애 낳은 내가 잘못이네. 이런 악 밖에 안 남은 세상에서 내 애 키우려고 한 내가 죽일 년이네. 이런 씨... 발.’

 

욕과 조롱을 참 쉽게도 내뱉는 세상 사람들을 눈앞에 마주한다면 그녀도 그들과 같이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욕과 조롱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너무도 쉽게 들려왔지만, 정작 그들의 실체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건의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남편의 유서에 쓰여있던 그 한 줄이었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특별 조사 위원회의 목표는 분명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그녀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식 죽어서 그게 한 이 돼서,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죽지도 못해서, 뭐라도 해야겠어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다음 세대 운운하는 위원회의 거룩하게만 보이려는 목표엔 하나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자신도 이모양인데, 관련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저 목표에 공감할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할수록 모든 것이 허무해질 뿐이었다.


‘그런다고 딸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는... 내 딸 얼굴이라도, 손길이라도, 아니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찾고 싶을 뿐이야... 고통 속에 물속에 잠겨 죽어간 내 딸, 저승 먼 길 갈 때 예쁘고 따뜻하게라도 보내주고 싶을 뿐인데... 난 엄마니까..’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고통과 행복 다 모두 인간이 하는 짓들인데, 왜 자식 잃은 슬픈 부모의 진실을 이 세상은 듣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가슴을 두드려도, 사방이 막힌 통곡의 벽에 갇혀 혼자만 시름시름 병들어 끙끙 앓으모 죽어가는 것만 같다.


통곡의 벽, 그 안에서 홀로 고개 숙인 그녀의 시야에 왼쪽 가슴 위에 달린 주황색 명찰이 들어온다. 딸의 이름 세 글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엄마를 토닥여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눈길로.



출처: Pinterest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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