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달라지길 바랬지만, 매일이 절망뿐이었던 날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1092.
그날은 그녀가 현실 속 커다란 티브이에서 비현실적인 그 사고를 들은 지 꼭 1092일이 지난날이었다.
“너무 오래 걸렸지... 미안해 내 딸...”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파도가 넘실대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있다. 그녀의 무채색 마음과는 달리 하늘은 파랗고, 그 아래 바다는 더 파랗다. 그 파랑의 물결 위 반짝이는 하얀 물보라의 거센 파도가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짤랑-
휘몰아치는 파도 소리 사이로 풍경소리가 처연하게 울려 퍼진다.
멍하니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던 그녀가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그대로 보였지만, 바다와 그녀 사이 거대한 쇳덩이의 형체가 부둣가 위에 널브러져 있다.
커다란 배.
다 녹슬어 빠진 배가 뉘어있다. 배의 선체 아랫부분의 새파란 부분은 당장이라도 항해를 계속하고 싶다는 듯 바다를 향하고 있지만, 승객들이 탑승했을 선체 윗부분은 그녀가 보이는 지상을 향해 꼬꾸라져 쓰러져 있다. 마치 무언가 잊고 온 게 있다는 듯 그렇게 그 배는 똑바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건져낼 수 있는 걸...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바로 어제였다.
그렇게 그리고 그렸던 딸이 곤히 잠들어있을 배가 마침내 깊은 바닷속에서 빛이 반짝이는 육지로 건져 올려졌다. 건져 올려지기 전날 밤만 해도 배만 보이면, 딸의 생명을 무참히 껴안고 짙은 심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 배만 보이면 배를 찢고 부수고 짓이겨서라도 들어가 자신의 소중한 딸을, 이미 저 원망스러운 바닷물에서 물거품으로 녹아 사라져 버렸을 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하지만 막상 바닷속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만큼이나 고통스럽다는 듯 두터운 녹이 잔뜩 쓴 쇳덩어리를 마주하고 보니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홀로 싸워온 그 세월 때문인지 자신의 눈물도 녹이 덕지덕지 붙은 듯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라버린 눈동자로 그저 하염없이 녹슨 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긴다.
배 주변에 다가서니 당연하다는 듯 접근금지 표지판이 둘러쳐져 있다. 저 배 안에 자신의 딸이, 아니 그 흔적이 갇혀있는데, 사고가 났던 그때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표지판의 날 선 글자들에 그녀는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다.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자신의 차가워진 주머니에 더 차디찬 손을 넣는다. 손에 잡힌 네모난 각진 딸의 명찰이 그녀의 손에 닿는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각진 부분을 주머니 속에서 굴린다. 마치 딸을 어루만지는 엄마의 손길처럼. 아니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고통에 얼룩진 손을 가만 둘 수 없는 불안을 감추려는 듯.
그렇게 그녀가 걸음을 옮겨 무심한 접근금지 표지판을 따라 녹슨 배 주변을 걷고 또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걸음을 멈춘 그녀가 방향을 바꿔 배를 등지고 바닷가 쪽으로 다가선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방파제를 커다란 파도가 때리고 또 때리고 있다. 그녀는 더 이상 겁날 게 없다는 아무 색이 없는 걸음으로 방파제를 따라 걷는다. 돌로 막힌 방파제의 끝자락을 조금씩 내려가더니 마침내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 앞에는 하얀 물거품이 녹는 바닷물이 고요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바닷물이 눈앞에 보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명찰이 들어있던 주머니의 반대쪽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든다. 낡은 신문지로 접은 돛단배다. 그녀의 한 손에는 돛단배가, 그리고 다른 손에는 딸의 주황색 명찰이 들려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돛단배와 명찰을 파도만큼이나 거칠어진 손으로 가지런히 모아든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어서인지 차갑게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들이닥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파도소리를 뚫고 녹슨 배 쪽에서 들리던 풍경소리가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숨을 고르던 그녀가 작지만 깊은 기도를 시작한다.
그렇게 몇 번의 풍경소리가 더 울렸을까?
어느 순간 눈을 뜬 그녀가 모은 손에 가지런히 들고 있던 돛단배를 자신의 한 발치 앞에 흩뿌려져 잇는 바닷물 위에 올린다. 그녀가 걸어왔던 방파제를 거칠게 때리던 파도와 달리, 그녀가 서있는 곳은 이상하리만큼 바다가 잔잔하다.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가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을 튕겨 돛단배의 돛을 밀어 바다를 향해 강제로 항해를 종용한다. 하지만 돛단배는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잊어버린 게 있어서인지 그녀와 헤어지기 싫다는 듯 자꾸만 그녀 쪽으로 돌아온다.
그런 배를 가만 내려다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멍한 눈길을 보낸다. 그리고는 아직 한 손에 들고 있던 딸의 주황색 명찰을 돛단배의 안쪽에 살포시 올려본다. 결코 작지 않은 이름 석자의 무게 때문인지 바닷물 위 돛단배가 잠시 휘청거린다.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것쯤 더 이상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짤랑-
바로 그때 다시 한번 풍경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맞춰 여전히 녹슨 쇠처럼 말라버린 눈동자로 돛단배를 응시하던 그녀가 두 손을 모아 돛단배를 다시 바다 쪽으로 힘줘 밀어 본다. 그러자 종이 돛단배가 그녀의 발치를 떠나는가 싶더니 마침내 지평선 너머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무지막지한 바다가 한낱 종이쪼가리로 만든 돛단배를 순식간에 집어삼킬 줄 알았지만, 신기하게도 너무나 굳건한 몸짓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돛단배 위 불안하게 세워진 주황색 명찰이 짙은 파란 바다빛에 대조되어 반짝 빛을 뽐낸다. 그리고 그 명찰 위 하얗게 파인 세 글자가 그녀의 눈에 닿자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세 글자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 괜찮다는 듯 더욱 반짝 거린다. 그 반짝임 때문인지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수많은 눈물들이 마치 별처럼 반짝거린다.
짤랑-
다시 한번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를 따라 따뜻한 천 개의 바람이 그녀의 눈물을 쓰다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