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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의 모습은 이런 거다

우리가 참 좋았을 때

by 타샤할머니

남편이 장난을 치면서 짓궂은 스킨십을 할 때면 첫째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갑자기 하던 걸 멈추고 저만치 달려가서는 기합을 넣으며 '스카이맨이 도와줄게'라고 외치면서 달려와 아빠에게 보복을 가한다. 그 파워가 날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예전 같은 둘만의 데이트는 못하지만 그리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설레었던 스킨십이 언제였을까 싶지만

남편의 이런 애정표현과 (애정표현이라고는 나만 생각하는 거? 그냥 그렇게 착각하는 편이 나에게도 이로운 걸로!) 엄마를 구하기 위해 변신하는 첫째의 출동도 나쁘지 않다. (우스꽝스러워도 나에겐 하나뿐인 슈퍼히어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의 모습은 이런 거다.

시간이 흐르면서 앞으로도 계속 변하겠지,

우리 사랑의 방식이. 우리 가족의 사랑하는 방식이.

예전엔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거라 생각했는데....

한결같던 남편도 결혼하니 변하는구나 서운해하는 내게 남편이 말하던 사랑의 방식이 이제야 와 닿다니...

근데 그렇게 포장해서 그렇지 솔직히 말하면 사랑이 좀 식은 건 사실 아니냐?




우리는 호주의 한 농장에서 만났다.

오빠가 나를 기억하는 첫 모습은 화장실을 가려고 이른 아침에 깨서 나왔는데 거실에서 내가 집주인 언니와 자고 있더란다.

내가 쓰게 될 방 주인이 담날 이사를 가서 도착한 첫날만 거실에서 주인 언니와 같이 잤을 때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데 누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걸 봤고 그게 오빠의 뒷모습이었다. '거참 되게 시끄럽게도 걷네, 걸음걸이도 팔자걸음에 참으로 이상타...'


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면서 애당초 2년을 계획했더랬다.

처음에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 구하고 정착하는데 시간과 돈을 까먹느니 차라리 농장에서 3개월 지내면서 비자를 1년 더 연장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만들어 놓자란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간 곳이 한국인 여자가 농장 일거리를 연결해 주고 집 셰어비를 받는 브리즈번 근교의 시골이었다.


난 그곳에서 두 달 정도 있었고 먼저 그곳을 떠났던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가 옮긴 곳은 호주인 농장주에게 바로 고용이 되어 있고 집도 직접 렌트했으니 모든 조건이 거기보다 좋다고 이 곳으로 오라고.

그리고 데리러 와주었다.


계획대로라면 한 달 정도만 더 농장에서 지내면 됐었지만 딸기농장의 수입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한적한 호주 시골마을에서 지내는 여유 있는 생활이 좋았다.

그래도 마냥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수입에 정점을 찍어 본 뒤 가까워진 오빠를 두고 난 호바트 여행을 갔고 퍼스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몇 달 뒤 1년 비자가 만료된 뒤 한국을 들어갔다던 오빠는 내가 있는 퍼스로 왔고 우린 그렇게 다시 만났다.



퍼스의 상징 스완 강/ 오빠와 퍼스에서 다시 만나 제일 처음으로 갔던 킹스파크. 퍼스 전경이 내려다보여 야경을 보러 밤에도 가고 드라이브도 자주 갔더랬지~
드넓은 공원도 많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바베큐 시설이 잘 되어있어 정말 좋다! 앞엔 바다가 펼쳐지는 저 공원이 최애 스팟~! 오빤 저때 소주가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돔 카페를 좋아했다. 사진엔 없지만 그 중 스카보로 비치가 보이는 돔에서 피시앤칩스 & 샐러드를 먹고 달달한 거품 풍성 카푸치노 한잔이면 세상 행복~!
동물원에 갔던 날. 갇혀 있는 동물들을 보기보단 숲 산책을 하며 자유롭게 다니는 동물들과 만났었지~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따뜻했고 밥먹는데 건드려 미안했고;;
고물차로 다섯 시간이나 걸려 갔기에 더 좋았나? 다른 관광객도 없었고 얼마나 멀리 올라갈수 있나 뛰어오르면서 사진 찍고 웃느라 우리만의 세상~


프리맨틀은 단골 데이트 코스. 오빠는 아직도 가끔씩 이 수제맥주공장에서 먹었던 맥주 얘기를 한다지~
역시나 퍼스에서 내가 제일가고 싶었던 곳은 얀쳅 국립공원. 조용한 숲 속에서 천천히 걷고 호수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고 캥거루와 코알라를 맘껏 볼 수 있는 최고의 힐링 장소!!
처음 보러 갔을 땐 저렇게 나무에 낑겨서 잠만 자고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가기 전 다시 들렀더니 운 좋게도 밥시간~! 아주 느릿느릿 나무에서 내려오는 코알라는 정말 너무 귀여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레이들리. 같은 집에서 셰어하는 사람들과 산책하다 돌아오는 길 저 어디쯤에서 오빠가 나에게 여러 질문들을 했었다. 한국에선 어디 살았는지 뭐를 했는지 등등.




애들이 없을 때는 신혼 생활을 더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주말 데이트였다.

술을 못하지만 같이 광역버스를 타고 나가 나도 칵테일 한잔 해보고, 맛있는 요리가 많은 주점에도 가보고, 한창 붐이었던 맛집 투어도 해보고, 연애할 때 가 봤던 곳을 다시 가보는 색다른 느낌의 데이트를 했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콘 아이스크림과 아메리카노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디저트를 먹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좋았다. 이때는 버스 텀이 길어도 좋을 때였다.

무엇보다 같이 막차 버스를 타고 들어와 집까지 걸어 들어갈 때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애가 하나 일 때는 짧게나마 간간히 했던 것 같다.

친정에 가서 첫째만 잠깐 맡겨두고 나와 영화를 보거나 유명한 카페를 간다거나,

명절 때는 같이 마사지를 받으러 가기도 하고 애기를 데리고 가긴 좀 그런 식당을 -양꼬치 식당- 가기도 했다.

두 번 정도는 엄마에게 집에 와서 첫째를 봐주기를 부탁해서 공연도 보고 왔었다.

첫째 임신 중이었을 때 내한을 했던 Sigur Rós 공연에 가지 못했던 한으로 시규어 로스가 게스트로 온다는 지산 록 페스티벌도 갔었고 한참 빠져있었던 노래를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다고 추운 겨울 샤부샤부를 먹고 박원 콘서트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둘만의 데이트 마지막이 친정에 애 둘을 다 재워 놓고 심야로 기생충을 보고 왔던 거다.

물론 예전엔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둘이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좋았다면 이젠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하는 데이트로 바뀐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저도 못하고 있으니....


나보다 둘째를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친구는 남편과 가끔씩 쇼핑을 한다, 영화를 본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나에겐 올 거 같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게도 머지않았다.

첫째 유치원 가고 둘째 어린이집 가면,

우리도 다시 데이트를 할 수 있겠지.

어떤 데이트를 하게 될지 뻔하지만, 솔직히 별 기대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확행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기에.

그리고 잘하고 싶어졌다.

더 좋은 엄마가 되고 더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어졌다.

잊혀져가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글을 쓰면서 지금의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과거의 내가 그리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내가 좋아지다니...

지금 내 모습이 더욱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진 건 잠깐이었다.

오히려 과거 내가 했던 것들은 충분히 경험해 봤으니 일단 현재 주어진 엄마로서의 역할부터 가뿐히 해내고 싶은 의지가 솟구쳤고 기본적으로 그 임무부터 멋지게 수행하면서 나 자신도 즐겁고 만족할만한 일이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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