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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25. 2024

548일

    초등학생 때는 정말 안경이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안경을 사달라고 하면 엄마가 순순히 사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눈이 나빠진다는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눈에다 괜히 손전등을 비추기도 하고 해를 똑바로 보기도 하고 티브이를 볼 때는 무조건 바짝 앞에 붙어서, 책을 볼 때는 어두침침한 데서 봤다. 이런 미련한 짓이 보람(?)이 있긴 있었다. 어느 날 칠판을 보는데 글자가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 얘길 했더니 속상해하며 나를 안경점에 데려가셨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첫 안경의 디자인은 안경점 주인의 의사가 90%, 엄마 의사가 10% 반영되었다. 동그란 모양에 안경다리 끝에만 분홍색이 들어간 은테였다. 그 다음은 유행을 따라 반무테로 맞췄다가 그다음엔 친구 안경을 따라 무테로 맞췄다. 이후 혼자 안경점에 갈 나이가 되고 나서는 맘껏 내 취향을 발휘했다. 금테, 검정테, 무광 갈색테, 검정 뿔테, 투명 뿔테, 큰 뿔테까지 웬만한 디자인은 한 번씩 다 시도해봤다.


    안경을 쓰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겨울에 실내에 있다가 밖에 나오면 안경알에 김이 서리고, 세수할 때도 안경을 벗고 쓰는 행위가 추가되고, 조금만 걸음이 빨라지면 안경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옆으로 눕거나 엎드려 누울 때도 안경을 벗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경을 벗은 맨 얼굴을 공개하는 게 무척 부담스러워진다!


    사람들은 내가 잠깐이라도 안경을 벗으면 호기심에 한 번씩 눈길을 준다. 안경을 안 쓴 모습은 어떨까 궁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거기에 기대가 깃들어 있는 게 참 난감하다. 이게 다 순정만화와 드라마 때문이다. 나도 안경을 벗으면 절세미녀로 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들 내 맨 얼굴을 보면 할 말을 잃고 애써 못 본 척한다. 그래요, 실망시켜서 죄송하네요. 여러분 덕분에 안경알을 닦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안경을 썼다 벗고 있습니다.


    안경을 맞출 때마다 후회했다. 왜 초등학생 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기를 쓰고 안경을 쓰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이 참 미숙해서 아쉬운 미소를 짓게 된다. 어릴 때의 실수를 평생 뒷감당하고 살아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형량이 너무 무겁다. 이럴 때 보면 우리 몸은 관대할 때보다 매정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머리를 잘못 자르면 두어 달 기르면 되고, 식탐을 내서 살집이 커지면 운동하고 소식하면 된다. 하지만 한 번 생긴 주근깨는 병원에 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고 한 번 뽑은 영구치는 다시 나지 않는다. 눈도 마찬가지이다. 라식 수술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런 것도 한 번쯤 만회할 기회를 주면 좋을 텐데.


    이번에 새 안경을 맞추면서 이십만 원 정도 썼다. 다행히 일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시력이 떨어지진 않았고 눈의 초점이 살짝 안쪽으로 기울기만 했단다. 그래, 이 정도면 선방이다. 하루 대부분을 노트북 앞에 앉아 있고 가끔은 잠들기 전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기도 하니까. 거기다 눈에 좋다는 루테인 같은 영양제나 블루베리, 당근 들을 챙겨 먹지도 않았으니까 나빠지지만 않으면 감지덕지다. 그래도 한 해에 한 번씩은 꼭 회한에 잠긴다. 아, 나도 눈이 좋을 때가 있었는데. 적어도 어두운 데서 스마트폰 보는 것만은 그만둬야겠다. 언제까지 공허한 마음을 시력을 제물 삼아 달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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