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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38화 눈 덮인 거북이 펜션

 11월에도 두 번의 거북이 콘서트가 열렸다. 이야기 손님은 선영과 친분이 있는 작가들이었다. 선영은 몇몇 작가들에게 ‘여기는 거북이 펜션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작가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영이 구례에 내려와 있는 걸 아는 작가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고 있던 터라 이메일의 의미를 뒤늦게 알고 놀라워했다. 선영은 그들에게 구독자가 7천 명으로 늘어난 유튜브 채널을 알려줬다. 처음으로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거북이 콘서트 영상을 본 작가들은 언제 이렇게 유튜브 채널을 끼웠냐며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자청해서 이야기 손님으로 오게 되었다. 음악 코너는 미자와 준석, 이환 이렇게 셋이 연주했고 이어서 미자의 시 낭송도 있었다. 


 선영이 출간 작업하던 재하의 원고는 11월 중순에 마무리되어 인쇄소로 넘어갔고, 드디어 12월 첫째 주에 『세상에 당연한 일이란 없다』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재하는 인쇄소에서 집으로 보내온 책을 받고 너무 기뻐서 단박에 펜션까지 달려와 선영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선영도 조금 전에 도착한 택배 상자에서 책 한 권을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사무실에 들어온 재하의 손에는 신간이 들려져 있었다. 

 “재하 씨, 책 봤어요? 어때요?”

 “하……, 너무…… 맘에…… 들어요. 하……, 그동안…… 수고……많았어요, ……선영 씨. 하, 하.”

 선영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하는 재하가 귀여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하 씨, 일단 여기 앉아서 숨 좀 돌리고 말해요.”

 “하, 하, 그럴……게요.”

 재하가 소파에 앉자, 선영도 책 한 권을 들고 그 옆에 앉았다.

 그때 선우가 사무실 문을 빼꼼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저 왔어요, 누나. 아, 재하 형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 근데 오늘은 빨리 왔네.”

 선영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하는 여전히 숨 가빠하며 손만 들어 인사했다.

 “아, 오늘 이환 형이 태권도 사범 회의가 있다고 조금 일찍 가야 한다고 해서요.”

 “그럼, 마트는 어쩌고?”
 “사장님한테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마트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보라고 하셨어요. 근데 재하 형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왜? 하, 하.”

 “그게 아니라, 숨이 좀…….”

 선우는 말하다 말고 쿡쿡 웃더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전 가서 일 볼게요. 수고하세요.” 하고 문을 닫았다. 

 “선우…… 왜…… 저러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재하 씨 숨소리가 거칠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요?”

 선영은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제야 재하도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알아채고 남이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집 문단속도 안 하고 그냥 왔네요. 집에 좀 갔다 올게요.”

 재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숨을 참아가며 랩을 하듯이 빠르게 말한 후 문 쪽으로 돌아섰다. 선영은 재하의 뒷모습에 대고 “네, 그래요, 다녀와요.” 했다. 재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 선영은 조금 전 당황하던 재하의 표정이 생각나 빙긋 웃었다.      


 그날 오후 재하는 선영의 사무실에서 책을 탁자 위에 탑처럼 쌓아 놓고 사인하느라 바빴다. 이번에 거북이 책방에서는 재하의 책을 모두 사인본만 판매할 예정이었다. 그것은 선영의 결정이었다. 판매되지 않는 사인본은 고스란히 책방에서 떠안아야 한다. 그걸 알고 있는 재하는 사인본이 안 나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재하 자신이 떠안고 싶으나 선영이 그러자고 할 리가 없다. 하지만 다른 데는 몰라도 직접 여기까지 와서 재하의 책을 사는 손님이라면 분명히 사인본을 선호할 거라는 게 선영의 생각이었다. 택배로 재하의 책을 주문하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다. 재하는 생각이 확고한 선영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선영이 미리 쌓아 놓은 책에 사인을 시작했다. 

 재하가 열심히 사인하고 있을 때 선영은 택배로 보낼 책을 포장했다. 그중에는 진보라, 김달, 현정과 수창, 김 데레사 수녀의 이름도 있었다. 펜션 식구들에게는 미리 재하가 점심시간에 사인본을 돌렸다. 책을 받아 든 식구들은 저자 사인본을 직접 받은 건 처음이라며 기뻐했다. 

 다음날부터 택배로 재하의 책을 받아본 사람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특히 재하의 책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던 보라는 책을 받자마자 책 표지와 사인 페이지를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지인들과 소속사 직원들에게 선물로 돌릴 거라며 사인본 백 권을 주문했다. 너무 많은 양이라 선영과 재하는 얼떨떨했지만, 보라는 자신이 도움을 많이 받은 지인들과 좋은 책을 공유하고 싶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들 대부분은 연예계 종사자들이었다. 보라에게서 책을 받은 이들이 저마다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포털사이트에서도 재하의 책 사진이 자주 등장했다. 

 이 영향으로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출판사로 전화가 왔다. 한 주의 신간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재하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며 책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는 전화였다. 작은 출판사라 다른 출판사처럼 홍보비를 많이 쓸 형편이 아니었던 터라 이보다 반가운 전화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재하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며 허락을 구하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재하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주로 서점에서 주최하는 북토크 초대였다. 선영은 신간이 막 나왔을 때 북토크를 하면 홍보 효과가 크다면서 재하에게 대도시 위주로 수락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재하는 선영의 말대로 일단 대도시에 있는 서점 위주로 북토크 일정을 잡았다. 그로 인해 재하의 몸은 무척 바빠졌지만, 책 판매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12월 중순에는 구례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치고는 꽤 많이 내려 거북이 펜션은 하룻밤 사이에 하얀 눈으로 덮였고, 그 경치는 보는 이들이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로 인해 눈 쌓인 도로를 뚫고 거북이 펜션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펜션 식구들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만 치우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미자는 수도원으로 피정을 떠났다. 1월 중순까지 진행되는 한 달간의 피정이었다. 올해도 역시 미자는 피정에 참여했다. 만약 펜션에 선영 혼자만 있어야 했다면 미자는 이번 피정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준석과 슬기와 율이 있고 가까이에 재하까지 살고 있어서 걱정 없이 피정을 떠날 수 있었다. 

 첫눈 이후로도 쌓인 눈이 녹을만하면 다시 눈이 내리기를 반복했다. 재하의 책은 이전 두 권보다 훨씬 높은 판매 실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만큼 재하는 북토크 일정으로 바빴다. 그러다 연말을 며칠 앞두고 재하가 아파서 드러눕고 말았다. 몸살이었다. 출간 이후로 북토크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선영은 자신이 재하를 아프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식사 때마다 준석이 죽을 쒀서 주면 선영이 죽과 먹을 것을 챙겨 재하 집으로 가서 재하를 돌봤다.

 “선영 씨 못 할 일만 시키네요.”

 재하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별말을 다 하네요. 저도 재하 씨 아픈 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요.”

 “단지 몸살이 난 건데 그게 왜 선영 씨 책임이겠어요?”

 “그게 아니라 재하 씨 힘들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북토크에 다니라고 떠민 것 같아서요.”

 “난 또. 다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설마 선영 씨가 하라고 해서 했겠어요. 작가라도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닌데 신간 나왔다고 불러주니 감사할 따름이죠. 그래서 대도시 말고도 소도시에서 하는 북토크에도 다닌 거고요.”

 “그래도 재하 씨가 아파서 누워있으니까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 자, 이거 먹고 힘내요.”

 선영이 죽과 물김치와 장조림이 올려진 쟁반을 재하에게 건넸다. 

 “그냥 식탁에서 먹어도 되는데…….”

 “그럼 이번까지만 여기서 먹어요. 그리고 내일이 올 마지막 날이라 송년회 겸해서 펜션 식구들 다 같이 저녁 식사하자고 했는데 재하 씨도 올 수 있겠어요?”
 “그럼요. 오늘까지만 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다행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그럴게요.”
 선영은 재하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 먹을 따뜻한 물을 가져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았다. 재하는 약을 먹고 잠시 선영과 북토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잠들었다. 선영은 재하가 잠든 후로도 한참 거실에 앉아 책을 읽다가 펜션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재하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펜션에 나왔다. 저녁에는 펜션 식구들의 송년회가 있었다. 다음 날부터 3일간은 펜션 휴무였다. 더구나 북스테이 중인 손님도 없는 터라 마음껏 즐기자는 분위기였다. 슬기도 율을 담요에 꽁꽁 싸서 데려와 유모차에 뉘어 놓았다. 율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웃으면서 내려다보는 어른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잠시 뒤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샴페인을 마셨다. 그러다 이런 날 음악이 빠지면 되겠냐며 선우가 준석에게 기타 연주를 주문하자 이환도 기타를 들고 준석과 함께 연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타 음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한참을 보낸 뒤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송년회를 마무리 지었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흥겨운 시간이었다. 

 모두 돌아가고 선영과 재하만 휴게실에 남았다. 조금만 있으면 새해였기 때문에 재하는 선영과 같이 있다가 새해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몸은 괜찮아요?”

 선영이 재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옆에 앉았다.

 “그럼요. 선영 씨 덕분에 씻은 듯이 나았어요.”

 “재하 씨 이번에 아프면서 얼굴이 핼쑥해진 거 알아요?”

 선영이 재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 그랬어요? 북토크에 다닌다고 몸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사실 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랬어요.”

 재하가 자기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이랬다니요? 혹시 아팠다고요?”

 “네. 늦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새해를 맞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허전하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혼자라는 생각에 외롭기도 하고요. 신기하게도 삼사일 호되게 앓고 나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다시 멀쩡해졌어요. 그것도 해마다 그러기에 언젠가부터는 내가 나 자신을 끌어안고 위로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좀 아직 어리죠?”

 재하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때 선영이 코를 훌쩍였다. 재하가 선영에게 눈을 돌렸다. 선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선영 씨, 왜 울어요? 어디 아파요?”

 재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영을 바라봤다. 

 “그게 아니라, 재하 씨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저도 일찍 부모님을 잃어서 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몸서리치게 외로웠던 적이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고모가 걱정할까 봐 표 안 내려고 일부러 씩씩한 척했지만, 밤에 이불 속에서 혼자 울 때가 많았어요.”
 선영이 식탁 위 냅킨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재하가 그런 선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독거렸다. 그러자 선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하를 바라봤다. 눈물에 잠긴 선영의 눈동자에 재하의 촉촉해진 눈이 빛났다. 선영이 흘리는 눈물은 재하 자신이 미처 흘려내지 못한 눈물 같았다.  그 순간 재하는 운명이 건네는 듯한 강렬한 이끌림에 휩싸였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사랑이 누구에게서 먼저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사랑이 우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선택했다는 것이고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선영의 눈물을 좇던 재하의 시선이 선영의 입술에 머물렀다. 재하가 선영에게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재하의 뜨거운 숨결이 선영의 얼굴에 닿자, 선영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재하는 선영에게 입을 맞추며 선영을 끌어안았다. 선영도 재하의 허리를 감쌌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얼굴을 쓰다듬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개가 멍멍 짖는 소리에 선영이 부스스 눈을 떴다. 몸 한쪽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때 재하의 팔이 선영을 끌어당겼다. 제야의 종소리가 끝나고 두 사람은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워하다가 재하의 집으로 와 사랑을 나눴다.

 “어, 재하 씨. 일어났어요?”
 “아직이요. 우리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요. 아니면 오늘 하루 종일 이대로 있어도 좋고요.”

 재하가 선영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진순이가 짖어요. 밥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시간 되면 항상 짖어요. 산책하러 가자는 거죠, 뭐. 근데 오늘은 선영 씨랑 이대로 있고 싶어요.”

 재하가 얼굴을 들고 선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입을 맞췄다. 선영도 재하의 뒷목을 감싸고 재하의 체온을 고스란히 받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온기에 취해 있을 때 밖에는 다시 눈이 내렸다. 

 오후 늦게야 그친 눈을 밟으며 재하와 선영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거북이 펜션은 하얀 눈에 덮인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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