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이 서서히 눈을 떴을 때 초점이 나간 밝은 불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와 선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조금 전보다 눈부심이 조금 덜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사물들이 하나같이 낯설어 일순 머리가 지근거렸다. 목이 말라 메마른 입술을 떼고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왼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 물질이 느껴졌다. 손을 조금 들었더니 링거줄이 손등에 연결되어 있었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를 본 순간 선영은 “재하 씨!” 하고 소리쳤다.
“어, 누나, 깼어요?”
준석이 눈에 들어왔다.
“준석아! 여기가 어디야? 재하 씨는?”
“누나,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요?”
“교통사고……. 재하 씨는 어딨어? 재하 씨는 괜찮아?”
“지금 형은…… 중환자실에 있어요.”
“중환자실에? 왜?”
선영은 중환자실이라는 말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누나, 링거 맞는 중이니까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어요. ……사실, 형이 머리를 다쳐서 수술받았거든요.”
“뭐, 수술을?”
“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어요. 근데 언제 깨어날지는 두고 봐야 안대요.”
선영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재하를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동시에 선영의 머릿속에서 흐릿했던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재하와 선영은 광주에 있는 한 백화점에 갔다. 그곳에서 맘에 드는 커플링을 사서 그 자리에서 서로의 손가락에 끼웠다. 반지를 꼈을 뿐인데 둘이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뭇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상대만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할 사람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두 사람은 사소한 것 하나에도 웃음을 흘리며 차를 타고 구례로 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맞은 편에서 오던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1차선에 있던 경차와 충돌했다. 그런 다음 2차선에서 주행하던 재하 차를 덮쳤다. 그 순간 선영은 의식을 잃었다.
재하와 선영은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선영은 이마가 찢어져 열 바늘 넘게 꿰매고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재하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선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이 다녀갔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를 낸 운전자는 만취 상태였고 먼저 충돌한 1차선 경차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경찰이 다녀가고 간호사는 선영의 손등에 연결된 링거줄을 제거했다. 선영은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고 어지러웠으나 그대로 병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준석의 도움을 받아 중환자실 앞 대기실로 가서 재하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준석은 재하가 깨어나면 알려주겠다며 선영을 병실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선영은 병실에 있으면 마음이 더 졸일 것 같다며 그대로 있기를 고집했다.
그러다 면회 시간에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본 재하의 모습은 아파서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단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선영은 그런 재하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문득 마치 꿈만 같았던 지난 며칠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삶은 밤하늘의 섬광 같다는 재하의 말이 떠올라 소리 없이 울었다.
3일째 되던 날 수도원에서 돌아온 미자는 선영과 재하의 사고 소식을 듣고 놀라 얼굴이 하얘진 상태로 병원을 찾았다. 미자는 선영과 재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재하는 곧 깨어날 테니 그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고 선영을 다독였다. 미자도 담당 의사를 만나봤는데, 수술은 잘 됐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다만 깨어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라며 기다려 보자고 했다. 선영은 미자를 펜션으로 돌려보내고 준석과 함께 병원에 남았다. 준석의 아버지 기동도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다가 준석이 병원에 있겠다고 해서 재하를 면회만 하고 돌아갔다.
선영은 면회 시간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재하의 얼굴과 손발을 닦았다. 재하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5일이 지났다.
‘과연 꿈같았던 며칠간의 섬광은 이대로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삶이 이토록 잔인할 리 없다.’
선영은 재하가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더욱 기도에 매달렸다.
6일째 되던 날 의사는 재하가 깨어나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고 했다. 수술 직후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 소리에 선영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다시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된 사랑이라면 여기가 끝이 리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하의 모습이 저렇게 평온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당신은 자비의 근원이시니 지금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재하 씨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인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저희 두 사람을 사랑으로 맺어주신 분도 당신이시니 우리의 사랑을 여기서 끝맺게 하지 마시고 저희를 더욱 사랑하게 하시어 그 사랑으로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어느새 7일째 아침이 밝았다. 선영은 대기실 앞 의자에 엎드려 있다. 그때 간호사들이 중환자실을 분주하게 드나든다. 잠시 후 담당 의사도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선영은 그런 분주함을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두 번 다 중환자실 의료진들은 분주한 움직임 후에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 흰 시트에 덮인 사망자가 실려 나왔다. 선영은 그 기억이 떠올라 심장이 심하게 두방망이질을 쳐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간절함이 극에 달한 선영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중환자실 유리문에 머리를 기대고 기도한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 간절히 비오니 제발 당신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여기서 끝맺게 하지 마시고 이 순간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소서.’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담당 의사가 선영의 앞에 선다.
‘주님,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
선영은 눈물을 글썽인 채로 고개를 든다. 심각하리라 짐작했던 의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선영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 환자가 깨어났어요.”
그 순간 선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착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시 정신줄을 붙잡고 바라본 의사의 표정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선영은 너무 기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선영이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선영을 본 재하가 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재하의 손을 꼭 잡았다. 재하는 울고 있는 선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힘들게 입술을 들썩였다.
“사랑해요.”
재하가 깨어나서 한 첫마디였다. 선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나도 사랑해요, 재하 씨. 깨어나 줘서 고마워요.”
선영은 눈물범벅인 채로 재하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윽고 재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재하를 보고 선영도 활짝 웃었다.
나중에 재하는 선영에게서 중환자실에 있던 자기 모습이 너무 평온해 보였다는 말을 듣고 사고가 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밝은 빛에 의식을 잃었고 잠시 후 희미하게 의식을 차렸을 때 죽은 어머니가 나타나 재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자장가를 불렀다. 재하는 다정한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재하를 흔들어 깨웠다. 재하가 눈을 떴을 때 어머니는 재하를 지긋이 바라보며 “이제 일어나야지, 재하야.” 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재하야, 엄마 때문에 고생 많았지? 미안해, 아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줘서 고맙다. 이제 일어나서 너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가야지. 사랑해, 아들.”
재하는 희미해지는 어머니를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희미한 빛이 느껴지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애타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선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