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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39화 삶은 밤하늘의 섬광 같은 것

 재하는 선영과 사랑을 나눈 후 세상이 온통 달라 보였다. 어제 본 하늘, 어제 숨 쉰 공기가 아니었고, 어제 걸었던 길, 어제 본 나무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미소를 지으며 재하에게 다가오는 선영은 어제의 선영이 아니었고, 그런 선영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 듯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향하는 재하 또한 어제의 재하가 아니었다. 재하를 변하게 한 건 바로 사랑이었다.

 재하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준 그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지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별 감흥 없이 들었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제는 알것 같았다, 밤하늘의 별빛은 그냥 별빛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자신에게로 달려온 소중한 자기 영혼의 반쪽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재하에게 사랑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고 그 사랑은 바로 선영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외로움은 다 이유가 있는 외로움이었고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은 다 이유가 있는 슬픔이었다. 이처럼 사랑은 재하의 지난 모든 순간을 단박에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재하에게 선영이 그런 존재이듯 재하 자신도 선영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랐다. 어쩌면 재하 자신보다 더 외롭고 슬픔이 많았을 그녀에게 지난 모든 외로움과 슬픔을 위로해 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다짐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의 사랑이 선영을 만나기 오래전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이미 재하의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정열과 용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재하는 선영의 옆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도 실실 웃음이 나오고 손을 잡고 있으면 온몸으로 퍼지는 온기가 좋아 절로 “너무 좋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선영은 그런 재하를 보고 행복해했다.  

    

 3일간의 연휴가 끝나고 재하는 선영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무 이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랑이고, 삶은 밤하늘의 섬광처럼 짧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곧장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프러포즈는 서로에게 이르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달려온 만큼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둘만의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을 세상에, 아니 운명에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혼자가 아닌 둘만의 새로운 여정을 꿈꾸며 재하는 어떤 방식으로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며칠 동안 생각한 끝에 재하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프러포즈하기로 마음먹었다. 재하는 서가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고 프러포즈 때 할 말을 타이핑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막상 글로 쓰려니 감정이 앞서서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재하가 프러포즈 문장을 쓰느라 열중하고 있을 때 선영이 다가오면 재하는 얼른 노트북을 닫고 책을 읽는 척했다. 그런 일이 잦았다. 거기서부터 선영의 오해가 시작되었다. 

 선영은 그런 재하에게 거리감이 느껴졌고 점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재하가 감추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선뜻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겹치자, 선영은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고 털어버려도 돌아서면 또다시 조금 전 생각이 꿈틀대며 올라왔다. 그 생각이란 재하가 자신과 보낸 하룻밤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은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독초처럼 다시 선영을 시험하러 들었다. 선영은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영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처럼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운 것이라는 걸. 이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다. 재하에 대한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됐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질타했다가 타이르기를 반복했다. 문득 언젠가 재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재하가 가진 슬픔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 지금 재하 씨에게 시간이 필요한 거야. 분명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거야. 머지않아 혼자 있는 시간을 끝내고 나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거야.’      


 그날도 재하는 급한 일이 있다고 펜션을 일찍 나섰다. 그런 재하를 선영은 아무 말 없이 보내고 씁쓸한 마음으로 휴게실 식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이라지만 며칠째 눈 소식이 없었고 햇볕도 따뜻해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선영은 창문을 활짝 열고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밝히는 조명등을 바라보며 재하와 함께 보낸 그날처럼 다시 눈이 내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 선영의 휴대전화에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재하가 보낸 문자였다.      


 -사랑하는 선영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 아래에는 링크된 주소가 있었다. 선영은 ‘사랑하는 선영 씨’라는 부분에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순간순간이지만 잠시 재하를 오해한 자신을 반성했다. 선영은 냅킨으로 눈물을 훔치고 링크된 주소를 눌렀다. 새로 나타난 화면은 재하의 유튜브 채널이었다. 재하는 거북이 펜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이후로 자기 채널에 영상을 예전만큼 자주 올리지는 못했다. 재하가 마지막으로 영상을 올린 때가 10월이었다. 출간 전에는 펜션에서 일하랴 원고 쓰랴 바빴고 출간 후에는 빠듯한 북토크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으니 따로 영상을 촬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선영이 재하의 채널에 들어온 건 석 달 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상이었다. ‘실시간 생방송’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재하의 생방송 영상은 처음이었다. 재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선영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은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들리는 가운데 재하 집 거실 한쪽 벽면이 비칠 뿐 재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영보다 먼저 들어온 구독자가 네 명 있었다. 

 음악이 끝나갈 무렵 정장 차림의 재하가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화면을 마주하고 앉았다. 겨울이 됐어도 재하의 머리 스타일은 여전히 스포츠머리였다. 그래서인지 타이를 맨 재하가 마치 패션 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세련되고 멋스러웠다. 평상시 타이를 매지 않는 재하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후 재하는 여전히 긴장된 표정으로 입술에 힘을 줬다 뺐다 움쩍거리더니 말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먼저 지금 이 영상을 시청하고 계신 구독자님들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송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부터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거든요.”

 프러포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선영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며칠 동안 재하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 듯한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자 재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다시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 듯한 재하의 행동에 잠시나마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때 선영은 화면 한쪽에서 주르륵 올라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실시간 댓글이었다. 시청 중인 구독자 수를 확인했더니 어느새 5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축하한다, 내가 더 설렌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너무 낭만적이다, 부럽다, 좋을 때다 등의 댓글이었다. 선영은 지금 혼자서 화면을 보고 있어도 마치 연극무대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선영 씨, 이 방송을 준비한다고 오늘 선영 씨만 두고 와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선영 씨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제가 선영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서 꾹 참고 돌아섰어요. 

 선영 씨, 사랑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엔 너무 빠르고 가벼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영 씨도 알다시피 선영 씨나 나는 오랫동안 외롭고 슬픈 시간을 보냈어요. 다른 사람은 그동안 고생했다, 힘들었겠다, 같은 말로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외로움과 슬픔의 터널 한가운데 있었던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픈 기억이었어요. 그런 우리가 뭐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삶으로 들어가 서로의 삶에 생기를 돌게 했어요. 난 선영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작가로 산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선영 씨를 알고부터 내 인생은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였고 드디어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확인하게 됐어요.”

 재하는 말하는 도중 가슴이 벅차 여러 번 멈칫했다.

 “선영 씨를 사랑하는 지금이 마치 꿈만 같아요. 그래서 저는 결심했어요. 지금까지는 혼자서 외롭게 걸어왔지만, 지금부터는 둘이 함께 걸어가야겠다고요. 선영 씨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재하는 한참 동안 자신이 준비한 원고를 끝까지 읽으며 선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선영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라는 말로 방송을 마무리했다. 

 선영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재하가 자신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이렇게 빨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기뻤다. 미적거리지 않고 당당히 둘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정확히 함으로써 마음껏 사랑하자는 재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방송을 끝낸 재하는 곧장 선영이 있는 펜션으로 달렸다. 선영도 어서 빨리 재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선영은 재하의 집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혼자 지키고 있던 휴게실과 책방 문단속을 끝냈다. 후문으로 가려면 손전등이 필요했다. 선영은 별관에 들러 손전등을 들고 후문을 향해 걸었다. 그때 헤드 랜턴을 머리에 단 재하가 후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선영 씨!” 하고 선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선영도 재하의 등을 두 손으로 감싸고 꼭 안았다. 재하가 얼굴을 들어 선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랑해요, 선영 씨!”

 “저도 사랑해요, 재하 씨!”

 가쁜 숨을 쉬던 재하가 선영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천천히 기울였다. 재하는 자기 입술이 선영의 입술에 닿을 때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길거리를 헤매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었다.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에 닿았다. 눈이었다. 고요한 밤하늘을 유영하는 하얀 눈송이들이 제법 많았다. 이런 상태로 눈이 밤새 내린다면 아침에는 수북이 쌓일 것 같았다. 선영은 자신이 바라던 눈이 내리자,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아 더없이 반가웠다.    

 

 다행히 눈은 새벽에 그쳤고 해가 뜨자 금세 녹기 시작했다. 아침에 재하의 침대에서 선영이 눈을 떴을 때 재하는 보이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나와보니 재하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식탁에는 토스트 두 접시가 놓여있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선영 씨?”

 재하가 선영이 나오는 걸 보고 다가와 입을 맞췄다. 

 “아침은 나중에 펜션에 가서 먹으면 되는데, 언제 일어나서 만들었어요?”

 선영이 재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별거 아니지만, 처음으로 선영 씨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간단하게 씻고 와요. 우리 이거 먹고 광주에 가요.”
 “광주에요? 무슨 일 있어요?”
 “우리 커플링 맞추게요. 서두르면 점심때는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펜션은 비수기라 오전에 선영 씨 없어도 준석이랑 선우가 알아서 할 거예요.”

 연휴 이후로 이환은 오전부터 태권도 수업이 있어서 선우가 마트를 그만두고 오전부터 일하고 있었다. 

 “커플링이요?”

 “네, 며칠 있으면 고모님이 돌아오실 거니까 그전에 커플링 맞춰서 끼게요.”

 “근데 광주 가는 길에는 눈이 다 녹았으려나 몰라요.”

 “여기에 눈이 이 정도 녹은 걸 보면 그쪽도 다 녹았을 거예요.”
 “좋아요. 그럼 빨리 먹고 출발해요, 재하 씨.”

 선영은 지난밤 프러포즈에 이어 커플링까지 하자는 재하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재하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 후 들뜬 기분으로 재하의 차로 광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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