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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홀로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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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Dec 08. 2023

지상낙원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하여 파도가 잔잔하고 겨울에도 바닷물이 따스한 멕시코의 휴양도시 Cancun에 다녀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지상의 낙원이었다.

  사실 나는 이런 리조트나 유람선 골프처럼 서민 대중이 즐기기엔 부담스럽게 돈이 많이 드는 소위 부르주아 취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나와 대다수 내 세대의 가치관을 형성한 역사적 사회적 경험이 다음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메타인지] 즉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 되어 인류의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경제력과 전 세계를 지배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 외교, 학문, 문화, 예술, 종교,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낙관적 세계관을 전파하던 미국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수용한 한국에서 태어나 그 막강한 힘의 원천이 되는 자본주의 체계와 그 배경이 된 과학적 실증주의, 이성적 합리주의, 자유와 인권을 이상적 기치로 내세우는 인본적 계몽주의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복종 검약 성실을 절대선으로 하는 가치관을 학교에서 배우고 유교적 전통과 이상적 사회주의 이념을 살짝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실용적 물질주의를 추구하지만 돈은 그 자체만으로는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라고 믿으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흐름에 편승한 한 역군이자 수혜자로서 근검절약 성실을 몸으로 실천하며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번에 평생 처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곳이 휴양지로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장소에서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일주일을 보낸다는 것이 왠지 따분할 수도 있고 어쩌면 유흥과 타락의 장소일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쇼생크 탈출'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돈과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남쪽 바닷가로 떠나는 것을 꿈으로 삼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도 생기고 마침 일도 뜸해져서 거금 3백만 원을 들여서 air canada vacation 패키지를 구입했다. 예약을 할 때는 낭비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막상 가서 왕복 비행기, 교통편과 7일간의 숙식이 모두 포함된 가격인 것을 따져보면 그렇게 비싼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경제적인 선택이었다.

  사실 나는 연천 휴전선 민통선에 있는 처가에 갈 때마다 전쟁 전에 이웃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체제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렇게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지 놀라웠고, 또 미국과 멕시코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보이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했기 때문에 미국과 멕시코를 실제로 방문해서 그 차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은 New York, Texas, California(San Fransisco, Los Angeles, San Diago), Washington (Seattle), Montana, Nevada(Las Vegas), Utha 등 꽤 여러 곳을 방문해 보았지만 멕시코는 범죄가 너무 많아 위험하다고 하고 딱히 계기도 없어서 한 번도 가 보지를 못 하고 다만 생각만으로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이태리, 영국, 미국 등 여타 모든 문명이 그러하듯이 풍요와 번영의 밑바탕에는 자유와 공정이 있으며 빈곤한 민중의 비참한 삶 뒤에는 무질서와 부패가 있지 않을까 짐작을 해볼 뿐이었다. 어디서나 사람들의 본성은 비슷하기에 누구나 욕심과 이기심이 있고 풍요롭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을 조화롭고 평화적으로 정당하게 추구하도록 서로 견제하는 체제와 전통과 문화를 세워나가느냐 아니면 부정과 폭력과 무질서와 궤변으로 권력을 빼앗아 독점하는 자들이 판을 치느냐에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휴양지 밖을 나가는 일정은 하루 잠깐 뿐이라 이런 점들을 관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아무튼 휴양지에 도착해 보니 너무나 편안하고 쾌적했으며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식 이태리식 그리스식 양식 중식 일식 그리고 육식 해산물 빵 과일 디저트 테킬라 맥주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과 음료와 술이 언제라도 무한정으로 제공되었고 냉방시설이 갖추어진 숙소와 모든 시설은 종업원들이 수시로 청소와 관리를 해 주었다. 입구와 주변 곳곳에서 경비원이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부드럽고 하얀 모래 위에 야자수 그늘이 시원한 해변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평상이 깔려있고 해수욕뿐만 아니라 윈드 서핑 등 다양한 물놀이도 무료로 즐길 수 있었으며 양궁, 탁구 등 스포츠와 댄스파티를 즐길 수도 있고 밤에는 공연과 서커스 등 볼거리도 다양했다.

  손님들 대부분은 미국과 캐나다와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고 모두 쾌활하고 여유 있고 예의를 지켰으며 추태를 부리거나 서로를 불편하게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크게 타락한 모습도 없고 건전한 가족 휴양지의 풍경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신기하게도 술이 무한 제공되는데 술 취한 사람이 없는 이곳이! 놀라웠다. 심야 한국 해변이나 한강변의 취객들이 보이는 추태와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우화에는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 가보았는데 시설과 음식과 모든 것이 같았는데 다만 거기 있는 사람들만 서로 달라서 천국에서는 서로 화목하게 나누고 지옥에서는 서로 빼앗고 해치며 악다구니를 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천국도 지옥도 그 구성원이 만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사람의 근본이 다른 것은 아니다. 사실은 이것도 제도와 문화가 만든 것이다. 여기라고 술 취할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분위기상 혼자 추태를 부리면 창피하고 또 즉시 쫓겨난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 자제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비록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돈이었고 멕시코 현지 직원들의 노고였지만 그러한 사실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오히려 직원들은 덕분에 좋은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고마움을 친절로 보답하는 듯했다. 아마 예전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지금의 큰 부자들이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데 익숙한 것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부촌과 관광 리조트 안의 한정된 장소 속에는 돈으로 산 지상낙원이 펼쳐져 있었지만 울타리 밖으로 나가니 가난한 멕시코 서민들의 삶이 있었다. 양철 지붕과 나무 기둥만 있고 담도 없는 허술한 단칸 오두막에 침대나 가구도 없이 해먹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농경지로 개간하지 않고 거의 버려져 있는 광활한 숲, 후덥지근한 기후 탓인지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어디를 가나 관광객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만 보였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닌 한 단면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한국이나 미국 어느 곳에 가도 이런 무기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백 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비숍여사의 견문록에 이런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내용이 생각나서 비감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선진국민의 일원이 되어 이런 여행을 올 수 있게 된 내 운명과 그것을 기적적으로 이루게 한 한국 근대사의 주역들에게 감사했다.

  비록 단편적이고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삶의 질과 의미를 결정하는 데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나라에서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가 얼마나 더 큰 변수인지 새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여행이었다.

  조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에 삼가며 지냈지만 지상낙원에서의 일주일이 즐겁고 편안했고 한 가지 남은 의문은 '과연 평생 이렇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사실 그럴 돈도 없겠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이것도 좀 지나면 지루하고 따분해져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 퇴임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바닷가에서 하인을 부리며 살겠다고 필리핀으로 떠난 어떤 교장선생님 내외가 지금도 행복하게 사시는지 궁금해진다.

  인생을 행복하고 충실하게 살고 싶으면 젊어서는 사랑에 투자하고 장년에는 일에 투자하고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경험에 투자를 하라는 말이 있다.(사실은 내가 만든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팔자에 없는 여행을 업으로 살고 있다가 보니 여행에 대한 낭만적 기대 같은 것은 없어졌고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 주변에서도 날마다 새로운 직간접적인 경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깨닫고 실천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한번 어제와 꼭 같은 오늘은 아닌 새로운 경험을 하고 느끼고 깨닫고 이렇게 나눈다는 점에서 이 돈과 시간이 낭비가 아니라 값진 투자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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