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양병원의 삶 (노년기의 삶)
결혼 이후 처음 방문한 배우자의 벌초 모임. 돌아가신 아버님의 산소이긴 하지만, 벌초에는 굳이 따라가지 않았었다. 올해는 아주 오랜만에 방문하였다.
“OO이는 시골이 있댔지? 할아버지, 할머니 다 계시든가?”
“네 다 계세요. 두 분은 병원에 계시긴 한데, 그래도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 다 계십니다.”
여차저차 시간을 보내고 올라와서 복잡한 감정이 들어 배우자에게 말하였다.
“거기 앉아서 할아버지랑 할머니 다 계세요~라고 대답하는데 좀 현타가 오더라. 결혼 이후로 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뵌 적이 없는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평소에 별로 챙기지도 않았지만, 문득 우리 가족을 너무 안 챙기고 있나 싶어서 죄송하기도 하고. 내가 좀 싫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했어. 너만 친척 있냐! 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심통도 났다.”
“그러게, 내 생각이 짧았다. 요번 명절에 당신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가자. 자기가 말 안 한다고 나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자고 말 안 해서 미안해.”
내가 잘 못한 것이 아쉬워 배우자에게 투정을 부렸지만, 사실 다 내 잘못이었다. 더 늦기 전에 살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며칠 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벌초는 잘 다녀왔니? 그나저나 외할아버지가 많이 안 좋으셔서, 추석 때까지는 못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네. 엄마는 수요일에 내려갈 거고 아빠는 토요일에 갈 거야.”
“그래? 그럼 나도 토요일에 갈게.”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던가. 보란 듯이 외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가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더더욱 미리 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안은 채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찾아간 요양병원은 군 단위 시골, 5만 명도 살지 않는 작은 곳에 있었다. 구불구불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간 그곳은 주변에 거의 아무것도 없이 요양병원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로나 때는 아니니까, 다행히 방문은 그래도 허용적인 편이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위독한 편이라 허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병동을 방문하자마자 느낀 전체적인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병문안 갈 일도 2-3번뿐인지라 많은 환자가 누워있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게다가 그 환자분들이 다들 연세가 아주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생기도, 기운도 나을 거라는 희망도 거의 없고 걸어 다니는 분은 매우 드물고, 누워있거나 묶여있거나.. 그랬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병실 중에서도 산소마스크를 끼고, 한쪽 손은 묶여있고, 눈은 하늘만 쳐다보는 가장 위독해 보이는 환자였다. (환자마다 묶여있는 까닭은 다양하지만, 무의식 중에 링거를 잡아 빼셔서 그렇다고 했다.)
반쪽이 마비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할아버지를 보고 나니, 절로 눈물이 났다. 그래도 엄마랑 이모들은 며칠 전부터 조금 괜찮았다가 아주 안 좋았다가를 왔다 갔다 하는 할아버지를 봐서 그런지 평소처럼 우리 왔다~ 하고 인사하였다. 순서대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나누며 손을 잡아드렸다.
나도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병실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힘없이 누워만 계셨다. TV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지내는 삶은 어떤 삶일까. 할아버지는 위독하기 전에도 여기 계셨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불과 며칠 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했는데 갑자기 말도 못 하고 누워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아플까.
할아버지께 기운 내시라고 손 잡아드리고 인사를 했다. 확실히 힘겨워보여서 더 이상 뭘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쉬실 수 있게 마무리하고, 옆 병실로 이동했다.
옆 병실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먼저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할머니는 몸도 편찮으셨고, 치매도 오신 지 꽤 되었다. 아기가 되었지만, 쭈굴쭈굴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보였다. 우리 외할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참 귀여우신 편이다.
“엄마~ 나 OO이 왔네~ 나 누구야?”
“응~ OO이”
라고 대답해 주신다. 한 명씩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잘 대답 못하셨지만, 온 사람 다 알려주고 한 번씩 누구냐고 물어보면 단기기억력에 의존하시는 듯 제법 정답을 말씀하셨다.
그 와중에도 기억이 나는 사람만 정답을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 아빠와 나는 할머니의 최애 사위와 손녀여서 그런지 바로 대답하셨다.
“O서방~ OO이”
이모도 다른 사람으로 말하고, 대답 못하는데 그 와중에 나는 알아보고 이쁘다고 하셔서 뿌듯한 철없는 손녀였다.
이가 없는 할머니는 단팥빵과 카스타드, 카스테라를 좋아하셔서 조금씩 뜯어서 입에 넣어드렸다. 말 그대로 냠냠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어찌나 아기 같던지.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 간병사가 한 마디 한다.
”이거~ 먹으면~ 입 안에 붙어서 떼기 어려워요~ 먹기 힘들어요”라고.
외숙모가 이 요양병원에 근무하며 있는데도 저리 말하는 간병사를 보며 평소에는 어떨까. 할머니가 그나마 좋아하는 음식들은 아무래도 하나도 못 드시겠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분은 그분 일을 하시는 거긴 했지만 말이다.
“네 그렇죠~ 알겠어요~ 이거 간병 여사님들이랑 같이 드세요” 하고 엄마가 음료 한 박스를 쑥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카스타드는 아마 남아돌 것이다.
귀찮게 자꾸 누구냐고 물어보고 하니, 할머니는 드시던 것을 다 드시고는
“이제 가요” 하셨다. 하하.
하긴 할아버지 안 보고 싶냐는 물음에는 “안 보고 싶어”라고, 할아버지한테도 이제 가라고 했다던데 이 정도면 많이 봐주신 것 같다.
요양병원을 뒤로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원래 사시던 집이 있는 옆 동네로 넘어갔다. 산과 강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절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만감이 교차했다.
요양병원의 삶.. 요양병원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참 안 좋았다. 요양병원에 부모를 모셔야만 했을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심지어 우리 엄마는 요양병원에 몇 년 근무했었는데 요양병원이 싫어서 절대 거기에는 취업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비슷한 연배의 그렇지 않은 주변 어르신들과도 비교되었다. 무엇이 노년기 삶을 가른 것일까? 그나마 좀 건강하셨으면 나았을 텐데..
요양병원에는 가급적 안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어떻게 늙어야 잘 늙는 걸까. 요양병원에 가고 안 가고는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될까. 몸이 따라 줄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을까. 뇌와 관련된 질환이 제일 답이 없구나. 왜 기술은 발전하지 않는 걸까? 결국은 돈인가..
배우자와 노년기, 요양병원의 삶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저 오늘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만 생길 뿐. 아직까지 노년기의 삶을 그리기에는 멀게 느껴져 어렵기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고 와서 기쁘기도 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고 무거운 마음은 잘 떨쳐지진 않았다. 그저 조금 더 건강해지시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녀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외할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