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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laire 북클레어 Nov 01. 2024

[소설] 기억의 암전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 순간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동시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후에 이것을 ‘기억의 암전’ 사건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딘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남은 가족들은 누가 있고, 그들과의 사이는 어땠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눈을 떴을 때,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팬티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진 나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낯설어 보였다. 내가 누구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한 동안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평범한 아파트 집의 거실에 있는 듯했다. 거실에는 3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 남자 한 명이 잠들어 있었다. 나를 제외한 3명 모두는 출근할 수 있을 정도의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사람들 주위로 늘어져 있는 여러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엌칼과 콘돔, 그리고 피가 뚝뚝 흘러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를 발견하고 나서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본능이 깨어났다. 가장 먼저 피의 출처를 살펴보았다. 나의 팔에는 상처가 있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가장 먼저 깨어난 나는 칼부터 먼저 집어 들어 엉덩이 쪽 팬티 속에 숨겼다. 칼을 숨긴 후, 재빨리 주위에 있는 아무 옷을 집어 들어 입었다. 옷은 나의 옷인 듯 편하게 아주 잘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려는지 꿈틀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나도 모르게 재빨리 누워 그들과 똑같이 깨어나는 척을 하였다. 


“무슨 일이지? 여기가 어디야?”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에 화장이 번진 얼굴을 한 여자가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나를 칼로 찌르려 했던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나도 사람들을 따라 말했다. “기억이 나는 게 없네요.” 최대한 나긋이 말했다. 


바닥에 흘린 피가 떠올랐다. 피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알 수 없다. 빨리 사람들 몰래 피를 지워야 한다. 나는 사람들 주의를 돌리려 말했다. “화장실에 가서 누구인지 얼굴부터 확인해 봐요.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라요.” 나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의 화장실부터 찾았다.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 나는 부엌인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휴지를 찾았다. 왠지 몸이 이미 이곳에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얼굴을 봐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어요.”   


“얼굴에 주름살이 있네요. 어린 나이는 벌써 훌쩍 지난 것 같아요.”


“저는 상처가 있어요. 피가 흐른 자국을 보니 얼마 안 된 것 같네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모두가 그런 걸 보면 우리가 뭘 이상한 걸 먹었거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거울을 봐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우리는 왜 여기에 같이 있을까요? 어떤 관계인 걸까요?”


사람들은 거울을 봐도 아무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지, 어떤 일이 생겼었는지를 추측하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보라고 한 사람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죠?”


거실에 묻어있는 피를 닦고 있던 중, 사람들이 의심이 시작될까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피가 묻은 휴지도 일단 모두 옷 속으로 숨겼다. 


“정신이 없네요. 이곳이 어디인지 둘러보고 있었어요. 옷 주머니들 한 번 뒤져보세요. 거기에 신분증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 


나를 죽이려 했던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나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냥 위협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이미 칼은 휘둘러졌고, 그에 대한 흔적도 남아있었다. 남자가 지갑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 남자의 배를 향해 시선이 갔다. 날렵한 몸은 아니었다. 나보다 키도 작았고, 그렇다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쉽게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남자는 이제 지갑 속 현황을 알려주었다. 


”현금 2만 원 정도가 꽂아져 있고, 민증에는 이름 주진우, 주소 강릉시 송정동이라고 써져 있네요. 사진의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낯설게 보일까요. 언제 찍은 사진일까요? “ 


이름과 주소가 써져 있는 민증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마 집으로 찾아가 봐야 자신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것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송정동일까요?”


남자는 바로 거실의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여기서 보이는 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네요. 어디 동네인지조차 모르겠어요.” 주진우라는 남자가 말했다. 


“여기는 누구 집일까요?” 화장기 없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서 다 같이 살고 있던 걸까요?” 화장이 번진 여자도 물었다. 


“한 번 알아보죠.” 주진우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이번엔 화장기 없는 여자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이름은 주혜미이고, 강남에 산다고 써져 있어요.”


“혹시 둘이 남매인가요?” 화장 번진 여자의 질문이다.


”둘 다 주 씨이니 그럴 가능성도 있네요. “ 나는 대화에 끼기 위해 크게 의미 없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게 없어요. “


”저도 아무것도 없어요. “ 화장 번진 여자의 말에 또 묻어가려 대답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두 분 옷차림도 우리보다는 편한 차림인데. 두 분이 우리를 초대한 것일지도 몰라요.” 확실히 화장기 없는 여자의 추측은 그럴듯해 보였다. 똑똑한 여자라는 게 느껴졌다. 주진우가 말했다. “아무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나요? 거기에는 그래도 알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은데.”  


이 집에도 분명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저들보다 빨리 집안을 뒤져야 내게 불리한 정보들을 숨길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집안 좀 둘러볼게요.”


“같이 둘러봐요.” 


저 재수 없는 새끼. 주진우가 나를 혼자두지 않는다. 아니면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함께 거실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침실부터 들어갔다. 


“나누어서 돌아다니는 게 어떨까요? 그게 더 빠를 텐데.” 


“그렇겠네요. 그렇게 해봐요.”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주진우가 무엇을 발견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찾는다면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진우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침실을 둘러보았다. 침실에는 무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부가 쓰는 방이라기에는 결혼식 사진도 걸려있지 않았고, 가구도 몇 개 없었으며, 휑하다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방이었다. 멀리서 주진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물건들이 거의 없어요. 옷가지들 몇 벌정도 밖에 없어요.”


점점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 또 핸드폰이 있어요. 근데 이건 배터리가 없네요.” 


“충전해 봐요.”


“제 거도 배터리가 나가있네요.”


“사진첩을 보니 거의 명품가방이랑, 음식사진들이 많이 있네요. 저는 굉장히 잘 사는 사람이었나 봐요. “ 


화장이 번져있는 여자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추측컨대, 멍청해서 다루기 쉬운 이 여자랑 이곳에서 자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저 두 여자와 모두 잤을 것이다. 그리고 저 주진우라는 놈은 그런 나에게 질투를 느끼고 나와 몸싸움을 벌이던 도중, 저 우둔한 몸뚱이로 나에게 상처를 냈을 것이다.


다들 어디론가 가서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에 나는 티브이를 켜보았다. 우리는 충전을 하는 동안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런 황당한 일이 우리에게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는 결혼한 사이였군요.”


건조한 말투로 화장끼 없는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자의 핸드폰이 켜지자마자, 나와 여자의 웃고 있는 얼굴이 화면에 보였다.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로 여자에게 어깨를 두른 나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보였다. 여자의 손에 있는 반지와 같은 반지였다. 여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나의 손에는 반지든 뭐든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드러나야 할 것들이 점차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멍청한 여자도 또 다른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멍청한 여자의 핸드폰을 낚아채 바닥에 던지고는 밟아댔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의 관계를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똑똑한 여자가 집을 나가버렸다. 


나의 몸이 화장끼 없는 여자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졌으니 저 여자에게서 나에 대한 미련 같은 것 따위는 없을 것이다. 주진우도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나갔다. 기억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기억조차 없는 저 인간들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추억조차 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듯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냥 사라져 주면 되는 거야. “라고 혼자 되뇌었다. 어딘가 씁쓸하지만, 어차피 난 좀 돈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분명 나에게 아쉬울 것은 없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되돌아올까? 

그럼 나를 사랑했던 그녀들도 다시 돌아올까? 

날 사랑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다면?


집은 비어졌고, 나의 마음도 그에 맞추어 함께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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