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싫다

이전의 봄은 싫었지만 내일의 봄은 기다림으로

by lisiantak
생각의 꽃이 피는 봄은 싫다
“새로운 생명이 잠에서 깨어나고, 자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줄기가 자라고, 숲의 고요함에 생명을 주는 것은 새들의 찬가이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가곡 <봄>의 가사 일부 내용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지금 두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은은하면서도 통통 튀는 생동감 있는 분위기다. 함부르크의 작사가 크리스티안 슈투름(Christian Christoph Strum)의 시에 정말 잘 맞는 옷을 입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봄을 좋아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만물이 소생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계절이 봄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봄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매서운 바람결에 온 몸을 움츠리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겨울은 가고 어서 봄이 오길. 기다리는 봄이 더디 올까봐 재촉하는 음악,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음악이 흐른다. 독일의 시인 크리스티안 오버벡(Christian Overbeck)이 쓴 시에 선율이 붙여진 <봄의 동경>이다. 봄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율과 가사다.


“5월이여, 오라. 나무들을 다시 푸르게 하고,
개울가에는 제비꽃이 피게 하라!
제비꽃을 다시 보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아, 5월이여, 나는 어서 산책을 하고 싶구나!
겨울날에도 즐거운 일이 많기는 하지.
눈길을 걷는 것도, 저녁의 카드놀이도, 그리고 썰매놀이도.
하지만 새들이 노래하고, 푸르른 잔디에서 뛰어노는 즐거움이란!
(중략)
오라, 5월이여, 우리 아이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오, 우리들을 위해 제비꽃이 먼저 피길!
그리고 종달새와 어여쁜 뻐꾸기도 어서 와주길!”


어느 성악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봄의 동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감상에 젖어 있는 나에게 잠시 후 시기와 질투의 생각이 찾아왔다.

'꽃이 좋다. 봄이 좋다. 그런데 생각의 꽃이 피는 봄은 안 좋다.'

생각의 꽃이 피는 봄을 사람들은 사춘기(思春期)라고 부른다. 인생의 계절 중 하나인 사춘기는 나에게 아픈 추억이 서린 계절이고 또 다른 아픔을 주고 갈 것 같아서 싫다. 일본은 경제 불황으로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인생의 황금기 잃어버린 7년이 있다. 그래서 봄은 모차르트의 음악 가사처럼 기다려지는 계절이 아니다. 그냥 나도 모르게 지나가 버린 계절이면 좋겠다. 윤달이 있는 해에 생일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며 어떻게든 생일을 챙긴다. 만일 사춘기에도 윤달이 있다면 사라진 사춘기를 찾으려 할까? 나는 단연코 안 찾을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인생에도 윤달이 있어 사춘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집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다가 일기장과 가계부를 보게 되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내용이다. 더더욱 남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금서이기도하다. 그런데 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직 아빠로서 사춘기 미션이 끝나지 않아서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배운다. 그처럼 과거의 부족한 아빠로서 아이들의 사춘기를 어떻게 대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버리지 못했다. 금서가 풀려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가 있을까? 그런 일은 없을지 모른다. 모두를 위해서. 어쩌면 이 정도가 풀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맞긴 하는 것 같은데 다시는 아프고 싶지 않다. 그만 성숙해도 되니까. 아니 아픔 말고 행복으로 성숙하고 싶다.

푸념 아닌 푸념을 또 내뱉는다. 아직도 진짜 아빠로 성숙되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나의 어린 시절 사춘기 때 부모님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지 않았을까? 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나무 막대기로 칼싸움하고 때론 넘어져 무릎이 깨져서 들어올 때 부모님의 마음을 나는 몰랐다. 알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의 꽃은 피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 마음을 헤아려서 행동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성숙했으면 성숙한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아빠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는 사춘기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픔만 클 뿐이다.


"아빠, 갱년기인가 봐!"

가끔 딸이 하는 말이다. 아빠와 심정이 잘 맞지 않을 때 하는 소리다. 10대의 사춘기와 50대의 갱년기. 인생은 사춘기판과 갱년기판이라는 두 판이 관계성 감정의 점성이 있는 멘틀 위를 제 각각 이동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관계성 감정의 힘이 판의 마찰저항을 초과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때 갑작스러운 미끄러짐 현상이 일어나면서 두 판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고 땅에서는 지진이다. 사춘기판과 갱년기판이 만나면 관계성 감정에서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다. 강도 9.0 이상이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전두엽이 발달한 엄마 아빠의 역할이 크다. 사춘기 아이는 아직 전두엽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리다. 판단이 어렵다. 그러니 어른의 몫이 크다. 거대한 두 판이 충돌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갱년기도 힘들다. 그러나 전두엽으로, 생각으로 갱년기를 다스려야 충돌을 막을 수 있다. 가정이라는 지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가정이라는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두 판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 그 판의 움직임이 이제 시작되려 한다. 딸의 사춘기 진입!


아. 왜 하필 갱년기와 사춘기가 만나야 하는가? 나도 갱년기로 충분히 힘들 텐데. 나의 성장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까? 어느덧 모차르트의 음악 <봄>이 끝나간다. 음악을 듣듯이 딸의 사춘기도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숲의 고요함에 생명을 주는 새들의 찬가'처럼 '딸의 사춘기에 사랑을 주는 아빠의 찬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전의 봄은 싫었지만 내일의 봄은 기다림으로 기억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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