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미가 미쳤다

사춘기 블랙홀에 빠져 들어가다.

by lisiantak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한용운 <복종>-


경기도 어느 시골에서 두 아들과 딸,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아파트 주변은 논밭이었고, 논밭 사이로 난 농로는 산책하기에 좋았다. 아이들과 손에 손잡고, 때로는 아이의 자전거를 밀어주면서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평온함과 여유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은 따뜻했다.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에서처럼 달콤했다. 그런 삶이 달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행복을 위해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 복종해서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에서 편안함을 얻는다. 가장, 남편, 아이들의 아빠로 그 위치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었다. 그래서 퇴근 후와 주말이면 몸이 피곤해도 나의 위치에 머물러 있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을 위해서다.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딸아이가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 수 있게 함께 해야 했다. 아이들과 놀다 보면 내가 먼저 지친다. 아이들보다 힘도 세고, 체력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내가 먼저 지치는 것일까? 언제나 내가 먼저 지쳐서 집으로 갔던 것 같다. 아이들은 어둠이 깔려도 집에 갈 줄 몰랐다. 괴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가끔 낡은 사진첩과 스마트폰에 저장된 과거의 사진들을 볼 때가 있다. 그때가 몸은 힘들었어도 그래도 행복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월은 우리의 행복을 시기라도 했던 것일까? 나와 가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나의 근무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들은 떠나기를 싫어했다. 친구와 학교를 떠나 낯선 것들과의 만남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해는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다 받아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살얼음과 같은 여린 마음들을 보듬어 주어야 했다.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설득에 설득을 하였고, 결국 함께 이사를 하였다. 그동안의 추억을 마음속에 담고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행복의 보금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이 학교에 잘 적응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간절한 부모의 마음에 응답해서일까? 아이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로 친구들을 빠르게 사귀어 나갔다. 딸아이는 어려서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비행기가 연착륙하듯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잘 꾸미고 있는 듯했다. 딱 여기까지!


일상의 일탈! 그것은 폭풍전야다.

남자아이들이 조금씩 이상해져 갔다. 아주 조금씩. 우리의 일상의 평온한 삶에 태풍 주의보가 발령된 듯했다.

9호 태풍 ‘마이삭(MAYSAK)’ 발달 임박… 한반도로 북상할 듯


20년 9월 초, 9호 태풍의 한반도 북상 예상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런 기분이랄까? 평화롭던 우리 가정에 1호 태풍(큰 아들 사춘기) 접근이 예보되어 긴장감이 돌았다. 이사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과 낯선 환경에 빨리 적응하려는 마음이 만나 태풍의 씨앗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멀리서 몰려오는 구름은 비를 잔뜩 품었다. 폭풍전야.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축구를 하러 나가서 너무 늦게 들어온다. 입에서는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나온다. 공부하러 도서관 간다면서 도서관에는 없다. 성적은 추락할 때로 추락하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들이 나와 아내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것은 강력한 태풍이 근접했음을 예보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일이...... 형 따라 동생도. 아, 미쳐버릴 지경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눈 덮인 광야를 걸어갈 때는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10호 태풍 하이선 온다…“마이삭 이어 곧바로 발생”


한 학년 차이가 나는 두 아들. 형의 사춘기에 이어 동생의 사춘기(2호 태풍)가 바로 시작되었다. 마치 9호 태풍 마이삭의 피해 복구와 아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10호 태풍 하이선이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엎친데 덮친 격, 설상가상이라는 말로 표현이 충분할까? 나는 출근이 출근이 아니었다. 출근해서 업무에 미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안될 상황이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야 했다. 내 마음을 아내가 알 수 없듯, 아내의 마음도 내가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혼돈상태였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두 아들의 사춘기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빠른 성공의 길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키는 길을 택해야 했다. 가장, 남편, 아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상황에 복종하는 것이 나와 가정의 행복을 지켜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가족들을 대전에 남겨 놓고 나는 서울로 갔다. 1년 동안 공부하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는 길, 자유의 몸을 택한 것이다. 아내에게 두 아들을 맡겨 놓고, 아니 딸까지 세 아이들을 맡겨 놓고 혼자 떠났다. 두 태풍을 맞으며 딸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을 아내에게 맡겨 놓고 떠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전화벨이 울리면 나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여보, 전화받을 수 있어요?" 아내의 전화였다. 그런데 전화받을 수 있느냐는 아내의 말에 왜 나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을까? 아내의 전화임을 아는 순간부터 내 마음에 공습경보가 울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화받을 수 있다고 하면 다음 말은 어김없이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전화는 받았지만 나의 모든 지체는 활동을 멈췄다. 입은 있어도 벙어리가 되었고, 뇌는 있어도 생각이 멈췄으며, 귀는 있어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심장박동수의 최고치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7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일까?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집에서 오는 전화에 놀라곤 한다. "여보, 전화받을 수 있어요?" 내 심장은 최고점을 향해 뛰었다가 뒤에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가라앉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내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케미가 미쳤다. 머리형인 나, 가슴형인 아내, 장형인 두 아들들. 장형의 자기 파괴적 삶에 가슴형과 머리형은 미쳐버렸다. 그래서 때로는 솔직히 아이들의 사춘기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졌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의 사춘기에 지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내 인생, 우리 부부의 인생은 사라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줄을 잡고 나면 아내는 말했다. "다시 해 봐요!" 고비고비마다 힘을 내 준 아내가 있었다. 고마웠다. 나는 휘몰아치는 두 아들들의 사춘기 태풍 속에서 아내가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언제나 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나도 내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에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행복을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프고 힘들지만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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