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개인’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다
9월 2일, 아이의 두 번째 생일에 얼마 남지 않은 연가를 마음먹고 썼다. 주말이 가까운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붙여 연가를 쓰면 가장 좋으나.. 하필 수요일. 일주일 딱 중앙에 자리 잡은 요일 덕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엄마의 손이 가장 필요한 아이에게 세상 큰 선물은 엄마와 보내는 시간일 것이다. 아이의 진정한 바람이 아닌 나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나의 미안한 마음이 앞장섰다. 일하는 엄마에게 늘 마음이 쓰이는 건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턱없이 적기 때문에.
태풍예보로 아침부터 비가 흩날렸다. 코로나로 인해 멀리 가진 못하고 꼭 해야 할 숙제들을 해치우기로 했다. 오전 내 집콕하고 낮잠을 푹 재우고, 두 번째 영유아 검진과 두 돌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모든 일정은 예약하지 않은 '게으른 엄마'가 하루 전날과 당일치기에 예약을 잡아놓은 수확이었다. 삶은 운칠기삼(일의 성패에 운이 7할 노력이 3할)이라 노력에 비해 운 좋은 하루였다.
늘 다니던 소아과에서는 원하는 일정에 영유아 검진을 받으려면 매달 1일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했다.
살고 있는 도시에선 그 소아과에 발달의학센터가 있어 영유아 검진을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라 예약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듣고 싶었던 수업을 수강 신청할 때 놓쳤던 지난 20대처럼, 8월과 9월 두 번씩이나 예약을 놓쳐버렸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때마침 주말에 아플 때 종종 들렀던 소아과에서 영유아 검진을 할 수 있다 해서 바로 달려갔다. 이왕 잘하는 곳에서 검진을 받으면 좋겠다만 계획이 틀어지면 어떤 일이든 마감일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니깐.
두 돌 기념사진은 동네에서 유명한 사진관이었지만 다행히 평일이라 당일치기로 바로 촬영할 수 있었다. 만삭 사진과 백일, 돌 사진은 몇 달 전부터 품을 들이고 예약했지만 이후 기념사진은 계획에 없었다.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않는 아이 아빠를 겨우 설득하여 돌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지배적이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이의 모습을 담는 일은 엄마의 할 일이었다. 그래도 이날은 우리가 한 해동안 성장했고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둘이서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이번 여름 동안 잘 어울리고 즐겨 입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가장 편한 옷을 입어야 몸이 자유로워서 미소도 잘 나오니깐!! 들인 시간에 비해 너무나 잘 나온 사진들 덕에 매년 우리의 기록을 남기기로 약속했다.
나의 경험을 반추하면 전업맘이었던 엄마는 0세부터 5세까지만 내 생일에 24시간 동안 같이 계셨다. 그 이후 유아원(YMCA)과 유치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등 부모님과 동거하는 19년의 세월 중 공교육으로 인해 13년의 시간은 부모님과 생일에 함께 보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분명 나는 13년 동안 개근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은 되도록이 아닌 절대! 결석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철학 덕에 성적과 상관없이 공교육 수업을 제대로 받긴 했다. 솔직히 나의 경우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부모님의 영향도 제법 컸을 것이다. 약 30년간 한 직장에서 출퇴근하는 아빠의 성실함이 내 안의 DNA에 있었을지도.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생일날은 겨울방학에 껴있었다. 새해 새달 중순에 태어나서 늘 겨울방학기간이라 친구들과 생일을 보낼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13년의 시간을 더듬어보면, 개근상을 받았지만 내 생일날은 겨울방학이었기에 부모님과 보낼 확률이 컸었다. 그 아쉬움을 알기에 엄마는 굳이 방학 때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을 소집해주셨고, 며칠 전부터 그 날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셨다. 추억의 앨범을 살펴보니 친구들에게 받은 여러 선물 꾸러미를 안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그날. 손수 엄마가 만드신 미역국과 김밥과 잡채, 치킨, 과자 등은 식탁 위에 성처럼 쌓여있었다.
어느 순간 생일은 가족의 대소사가 아닌 내 주변의 사회관계 속에서 맺어진 이들의 행사가 되었다. 사회생활 즉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생일상을 준비한 엄마의 마음은 본인과 함께 나눠먹을 생일상이 아닌 친구들과 우애 좋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더해졌다. 오로지 딸의 교우관계를 위해 격려하고 희생했던 시간이었다. 그 지속된 마음은 20대가 들어서 단절되기도 했다. 타지에서 독립생활을 하게 된 19살의 시간부터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즐겼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홀로 독립생활을 시작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소비할지 몰랐지만 내가 내 시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유를 만끽했었다. 20대의 나의 생일은 내 가까이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함께 해줬다.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푸는 시간이 선물 같았고 고마웠던 시간이었다. 그때 유독 생일 때마다 함께 해준 친구가 있었다. 문학소녀였던 그 친구는 생일선물로 손편지와 신간을 선물해주었는데, 그 친구에게 받은 책 선물 중 잘 알려진 저자를 2020년 1월 16일 생일날!! 만났다. 생일에 받은 책의 저자를 몇 해 지난 생일에 만나보게 되다니. 그것도 오로지 둘이서만 2시간 동안! 대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존경했던 분을 USO에서 기획한 <당신을 인터뷰해드립니다> 프로젝트에 신청하여 인터뷰이로 당첨이 된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빛을 봤던 그날. 내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겨진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큰 보물이었다. 인터뷰어로 나선 저자, 조선비즈의 김지수 기자님은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과 <자존가들>를 출간했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인터뷰 연재 콘텐츠를 게재하고 계셨다. 보그지에 계셨을 때 그분의 피처기사를 스크랩하며 탐독했고, 인터뷰 기사로 김주원 발레리나와 이정윤 무용수를 알게 되었다.(그들을 알게 된 몇 년 후 신기하게도 그들을 만났고 인터뷰할 기회도 생겼다.)
일을 하는 엄마로서 삶의 갈피를 못 잡고 헤맸던 지난 1월, 좋은 어른을 쫓으며 내 커리어에도 내 인성에도 도움될 인생 멘토를 가까이에 찾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거창한 생일상보단 주어진 시간을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로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마침 인터뷰에서 기자님은 "우리 좋은 개인이 되도록 노력해요”라고 현답을 주셨다. 각자의 삶에서 열심히 사는 좋은 개인이 되자고. 이후 내 좌우명은 '좋은 개인이 되자'였다.
1월 이후 번아웃의 시기가 종종 다가온 순간에는 인터뷰 소책자를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다.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잊게 마련이니깐. 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역시나 나 자신뿐이다. 내가 세상에 나오는 날이 존재의 이유를 되새겨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지하기 전까지 매년 9월 2일은 연가를 쓰려고 한다. (공식 선언!!) 아이가 원하는 공간에서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힘써줄 것이다.
이제야... 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지난 1월 16일, 태어난 지 35년을 맞은 날...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직 세상에 이름을 널릴 알릴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하지 못했던...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다만 인터뷰에 응했던 것은 제가 가진 사회적 역할과 직업을 벗어나서... 오로지 나다운,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진솔한 제 생각을 전할 수 있었기에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매체에도 실리지 않는.. 오로지 제 자신에게만 건넬 수 있는 인터뷰 소책자와 녹음테이프 등 가보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기록물 때문에 용기를 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터뷰어를 가장 신뢰하였기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는데요. 제겐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습니다..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진로와 가치관이 재정립될 무렵, 저만의 롤모델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이죠. 10여 년간 만나고 싶었던 그 우상께 낯부끄러운 저의 이야기가 인터뷰의 주제라는 점이.... 살짝 겁이 났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 하기에 주저하기도 했죠.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명망이 높은 수많은 이들을 만난 문화계 전문 인터뷰어이시기 때문이었죠. 그에 비해 저는 너무나 하찮고 작은 존재인데.. 그분의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 마음보다 앞선 실행력과 정보력 덕에 인터뷰 프로젝트를 신청했고! 한 차례 고배를 마신 후.. 기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두 시간 동안 꿈같은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잠시 별나라에 다녀온 거 같았어요.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났었던 시간.. A4용지 15장, 즉 30면을 채운 인터뷰였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거나 제 이야기가 궁금하신다면 인터뷰 소책자를 기꺼이 건네드리겠습니다. 아래에 기자님과 약속한.. 앞으로 제가 꼭 이뤄야 할 목표를 알려드릴게요. 제 인생의 단편영화를 만들어주셨던 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USO) 스태프분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올해 제가 꼽은 최고의 책은 <자존가들> 입니다. 제 카톡 프로필에도 게시해놓았지요. 그리고 인터뷰 내 언급된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책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올해 저의 책 모임에서도 제가 선정하여 같이 읽었답니다. 기자님과 두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을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기자님 : 나는 나의 속도와 가치에 맞게 내 개인이 성장해 가는 거지, 누구의 특별한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조직에서도 그렇고, 어디든, 그냥 동등하게 개인인 거예요. 그냥 좋은 개인으로 내가 좀 더 나를 많이 만족시켜야 되겠다 정도.
•raison : 누군가가 나를 PR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훈련을 조금씩 했던 것 같아요. 이런 걸 써서 신청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나를 계속 포장을 해야 되고, 좋은 사람이기보다는 나를 계속 객관화시키면서 나의 이력을 쓰는 거죠. 어떻게 보면, 내가 나 스스로 자서전을 쓰는 경험. 조금 더 객관화하는 게 그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인 거 같아요. 그런 과정을 많이 해보는 게. 그래서 인터뷰를 했던 대상자, 일반인 친구들 대상으로 하는 것도 그 친구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친구도 자기 글을 읽으면서 자기를 사랑하게끔 하는 것.
일반인들은 살면서 그런 걸 겪기가 힘들잖아요. 그런 감정을 제가 해주고 싶었던 것도.
좋은 개인이라는 게 정말 내가 나를 사랑하면.
•기자님 : 나를 사랑하고 타인들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계기를 만드는 일.
•raison: 좋은 개인이라는 거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기자님 : 그리고 raison 씨처럼 계속 자기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인 시험대를 계속 마련하고.
#우리모두_좋은_개인이_됩시다 #평생목표
나의 속도와 가치에 맞게
: 잡지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찾다
https://brunch.co.kr/@hyejeongson/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