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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Oct 17. 2024

19화.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할 뿐

다시 새로운 아침, 민준은 회사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7시 즈음에 일어난다.

7시 45분쯤 학교에 가는 아이 등교 준비를 같이 돕기 위해서다. 먼저 일어난 사람이 아침 준비를 하고, 조금 늦게 일어난 사람은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조금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차로 데려다준다. 집에 돌아오면 같이 청소하고 조금 여유롭게 식탁에 남겨진 아침을 먹는다. 대부분 간단하게 식빵으로 만든 프렌치토스트나 샌드위치, 커피와 과일 몇 조각이다. 부동산 투자 관련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투자할 만한 물건 검색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임장을 가기도 한다. 최근 낙찰받은 빌라에 살고 있는 전 소유자에게 보낼 내용증명 서류를 작성하기도 하고, 매각허가결정이나 잔금 납부일 같은 걸 확인하기 위해 법원 사이트를 들락거리기도 한다. 전 소유자가 고의로 법원등기 받기를 거부하고 안 받으면, ‘폐문부재’ 몇 번을 거쳐 ‘특별송달’을 별도로 신청해야 하기도 한다. 명확하면 좋겠지만 법원마다 절차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일이 전화로 진행상황과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한다. 경락잔금대출을 알아볼 때는 여러 대출상담사와 연락해 가며 더 나은 조건을 찾고, 대출 관련 서류 한 뭉치를 준비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린다. 휴직 중이라 회사 인사팀에 연락해야 할 상황이 생길 때는 조금 난감하기도 하다. 건축물 상황이나 여러 자치구 규정 확인을 위해 관련 부처에 전화하기도 한다.      


남는 시간에는 회사 다닐 땐 여유롭게 보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도 하고, 주로 부동산이나 세금 관련 책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잘 읽지 않았던 책을 읽기도 한다.  좋아하는 아이가 백번 권해주는 어린이책을 꾸역꾸역 읽기도 하고, 아이와 같이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학원에도 데려다준다. 내가 요청하는 각종 집안일을 해결하기도 한다. 가끔 시간 죽이기용으로 핸드폰을 보다가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쓸모없는 걸 잔뜩 사기도 한다. 이건 나도 그렇지만. 최근에야 시부모님에게 육아휴직한 걸 말씀드렸는데 그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시아버지의 민원을 처리하기도 한다. 각종 영양제 사기, 스마트폰으로 해야 하는 각종 일, 자동차 보험 연장, 자동차용품 검색 등등. 우리가 좀 더 젊었을 때는 우리가 뭔가 조언해 드릴 때도 "너희가 뭘 알아. 아빠가 알아서 할거여"로 치부되곤 했는데, 점점 더 우리에게 의지하시고 더 많은 걸 주문하시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핸드폰 가게를 하는 동네 지인한테 엄청난 돈을 내고 엄청난 요금제에 가입하며 잘 샀다며 전화를 하셔서 뒷목 잡게 하시기도 한다. 이미 저질러버린 뒤에야 말씀하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경매 이야기를 해드린 이후로는 경매로 산 집은 전세 내놨냐며, 살고 있는 사람은 나갔냐며 자주 물어보신다. 민준은 안 그래도 외동아들로 40년 가까이 살아오며 너무 힘들었는데, 휴직한 걸 알린 후 완전히 김범석 씨 개인비서가 되었다며 나에게 한탄한다. 슬로바키아와 영국에서 6년을 살 때는 두 분이서 어떻게든 잘만 처리하며 사셨는데 우리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 시절은 까맣게 잊으시고 아주 조그만 일에도 해결해 달라며 전화하시곤 했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휴직한 자는 부모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잉여노동자 취급을 받고, 가끔 버럭하고 불안한 미래에 예민해지지만 어쨌거나 잘 버텨내고 있다. 다행히도 할 일이 끊임없이 생겨서 나태해질 수가 없고 활기차 보인다.      


첫 번째 빌라는 유니콘 같은 점유자를 만나 아름답게 이별하고, 드디어 전세 세입자가 들어왔다. 계약하려는 시기에 정부에서 갑자기 집값상승과 갭투자를 막기 위한 대출규제 폭탄을 터뜨렸다. 대출이 낀 집은 전세자금대출이 안 나오게 막는 바람에 우리는 경락잔금대출을 모두 갚아야 했다. 내 집을 전세주고 받은 전세보증금 조금 남은 것과 마이너스통장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언제 뭐가 불쑥불쑥 튀어나올지 몰라 늘 가슴을 졸이게 되는데, 그러고 한 달이 지나자 그 규제는 다시 흐지부지되었다. 부동산 사장님 말씀을 들으니 3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단다. 우리가 새 집에 들어갈 시기였다. 아마 그전에도, 그 그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맥락 없는 땜빵용 보여주기식 부동산 정책이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부동산공화국에서 부동산 공부를 안 했다간 내 재산도 그 자리에 머물러있고, 남편은 회사 좋은 일만 하며 그대로 곰팡내 나게 썩어갈 뻔했다. 학교에선 왜 세금과 경제 교육을 제대로 안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아이도 아빤 맨날 자기한테 부동산이랑 주식 이야길 하는데, 학교에선 왜 안 배우냐며 더 잘 알고 싶다고 의아해했다.     

 

한편 두 번째 낙찰받은 빌라에는 세입자가 아닌 전 소유주가 살고 있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자신을 대리인이라 칭하는 사기꾼이 끼어들어 그 사람이 정말 대리인인 줄 알고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나중에 다른 채권자와 이야기하다가 그 사람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대출을 받고 등기를 치고 소유가 넘어와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도, 내용증명을 보내고, 곧 강제집행을 하겠다고 협박성 문구를 조심스레 넣어도 전소유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다행으로 자식들도 잘 되고 사정이 많이 어렵지는 않은데 사업이 잘못되어 집이 경매로 넘어간 것 같았다. 법원에 ‘이 부동산을 진짜 소유자에게 인도하라.’는 인도명령을 신청해 인용받았고, 끝끝내 나가지 않고 버틴다면 이번에는 강제집행을 해보는 경험치를 얻게 될 것이다. 대출이자를 계속 내야 하므로 언제까지고 두고 볼 순 없다. 적당히 이사비를 주더라도 원만하게 합의되길 바랄 뿐이다.  조바심의 남자, 민준을 얼르고 달래어 ‘결국 법은 우리 편이고, 우린 하나도 아쉬울 게 없다.’를 계속 주입하며, 그가 늘 조급해하고 앞서나가려는 것을 막는 것을 주로 담당하는 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우리의 예상대로 지금 거금을 투자할 생각이 전혀 없으셨고, 마침 모텔에 세를 들어 운영하고 있는 세입자가 2년 계약 연장을 요청했기에 리모델링은 다시 2년 뒤를 기약하게 되었다. 월세를 두어 번 내고 쭉 안 내면서 보증금을 다 까먹은 그 세입자의 편의를 시어머니가 또 봐주시려고 하기에 민준은 버럭 화를 내며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전화통을 붙잡고 소릴 질러댔다.     


"아! 엄마! 쫌! 그 사람 말 뭘 믿고 연말까지 기다려줘? 정말 더 연장하고 싶으면 밀린 월세부터 먼저 다 내고 의지를 보여주라고 해. 그 사람 속 딱 보이잖아? 연말 크리스마스 특수 노리고 질질 끌면서 한번 더 해 먹고 연초 되면 딱 못하겠다고 나간다고 그럴 거라니까? 계약종료일 되기 전에 계약서 무조건 다시 쓰고, 보증금도 올려 받아. 거기 지금 월세도 너무 낮아! 내가 상가 공부 해보고 계산해 보니까 알겠어. 그거 지금 말도 안 되는 월세야! 주변 시세 봐도 그렇고. 내 말 잘 알겠지? 엄마가 말 못 하겠으면 내가 할게. 그 사람 전화번호 알려줘. 아들이라고 하고 내가 해볼게!"     


시어머니는 허허허 웃으시며 일단 본인이 다시 얘기를 해보겠다고 하셨다. 그날 오후 시아버지도 전활 하셔서 이렇게 이렇게 말하면 되겠느냐고 민준에게 조언을 구하셨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빌라를 팔아 몇억의 수익을 내고, 시부모님의 모텔도 리모델링해서 문전성시를 이루며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너 건너 경매 투자를 하다가 접거나 망했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온라인에만 있는 듯했다. 육아휴직하고 육아에 전념한 아빠 이야기나 N잡러가 된 파이어족 이야기는 많지만, 경매에 도전한 생생한 후기는 찾기 어려워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민준은 내년에 회사에 돌아갈 수도 있고, 내후년에 돌아갈 수도 있다. 육아휴직은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의 꿈대로 영원한 퇴사에 성공할 수도 있겠지. 아이 대학 등록금까지 나올 회사를 때려치우는 것은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만일 두 번째 빌라를 팔지 못하고 휴직을 1년 더 연장하게 된다면 나의 불안감은 더 커지고 우리의 씀씀이는 더 줄어들 거다. 하지만 이 남자의 집념과 광기를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똥으로라도 된장을 만들어 놓을 거고, 자신이 벌놓은 일들을 어떻게든 책임지리라고 믿는다. 더군다나 반년 사이 이 남자가 의의로 요리에 소질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어 주방을 가끔 넘기는 특혜도 누리고 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가질 수 있는 걸 더 잘 이용하기로 했다.

2년 뒤 이 월셋집에서 이사 나가 좀 더 넓고 깨끗한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글을 쓸 것이다. 집념과 끈기는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돈 안 되는 글을 꼭 지금 써야겠냐고, 아무리 핍박받아도 굴하지 않고 쓸 것이다. 최근 한강 작가님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뭉클하고 감격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 각자 잘하는 걸 하자고 남편아. 내가 볼 땐 너는 부동산 투자가 적성에 아주 딱 맞아. 운도 실력이라는데 네가 선택한 그 집들은 무조건 가치가 오를 곳들이잖아. 시부모님 모텔도 언젠가 네가 쌓아갈 실력으로 멋지게 탈바꿈하길. 나의 인테리어 안목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는 도울 것이고, 나는 지금처럼 너의 이야기를 재밌게 써줄게. 너를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게. 언젠가 내가 진짜 하고픈 나의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는 발판으로 너를 이야기를 좀 이용할게. 대기업에 다니는 김민준 책임, 책임이 된 지 2년 만에 회사를 뛰쳐나왔지만, '책임님'이 아닌 ‘투자자 김민준’도 받아들이고, 온 마음 다해 응원할 수 있도록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노력해 볼게. 부디 너도 마음 깊이 나의 여정을 응원하며 나의 글이 드라마가 되어, 영화가 되어 넷플릭스에 걸리게 될 그날을 기다려줘.           

    


긴 여정,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음 주 이 시간.. –에필로그-를 써보도록 할게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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