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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Sep 18. 2024

16화. 여름이었고, 또한 가을이었다.

- 아이에게 물려주고픈 유산

한바탕 울산 상가 바람이 지나가고 정말 오랜만에 여행을 다녀오며 잠시 쉬었을 뿐인데, 일상으로 돌아왔더니 어느새 이사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꼭 3여 년 전 여름, 우리는 경기 남부에 살며 분양받았던 이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을지 마음을 몇 달이나 졸이고 있었다. 부동산 정책은 눈을 감았다 뜨면 바뀌기 일쑤였고, 특히 대한민국에서 서울 신축 아파트에 대한 세금이나 각종 대출 규제 같은 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였기에 정권에 따라, 미국 금리 같은 중요 이슈에 따라 급변하곤 했다. 3년 전 아파트 입주를 위해 우리는 마지막으로 잔금 대출, 그러니까 주택담보대출을 알아보고 있었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정책기조 변화에 몇 달 전만 해도 2~3%대를 유지했던 금리는 폭등하여 3% 후반에서 4%를 훌쩍 넘겼다. 이미 몇 년 전에 분양받아두고 입주만 오매불망 기다렸던 내 집에 입주하기 위해 몇 달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이자를 내야만 하는 상황으로 급변했고, 우리는 몇 달을 마음 졸이며 절망했었다. 당시 3.95%, 5년 고정금리로 겨우겨우 어렵게 대출을 받았는데 해를 넘겨 새해에 대출을 받은 다른 입주민들은 4%를 가뿐하게 넘겼고, 코로나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6개월 변동금리로 대출받고 들어온 사람들은 다음 해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은 또 4% 초반의 금리는 오히려 낮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준이 되었다. 서울에서 집을 산다는 건 그런 예측불가능한 흐름 속에 내 가족의 운명을 맡기고 적절한 시기에 치고 빠지는 눈치게임이 필요한 그런 일이 돼버린 걸까?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이 집은 역병의 시기를 통과하며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 때문에 신축 치고는 상승폭이 없다시피 했다. 아니 거래 자체가 뚝 끊겼었는데, 인생은 타이밍이란 말이 이번에는 어쩜 들어맞는지, 최종목표를 언젠가의 퇴사로 설정하고 투자자의 삶을 꿈꾸며 남편이 육아휴직한 바로 이 시점에, 절망 끝에서 매달 나가는 주거비 고정지출을 줄이기 위해 집을 전세 주려고 내놨더니 꼭 그 타이밍에 꽁꽁 얼어붙었던 부동산 시장이 갑자기 들썩이기 시작하다니 눈 깜짝할 새 전세 세입자를 구한 것이다. 3년 전엔 날 울게 하던 부동산이 갑자기 구원투수가 되었다.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보다 이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미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민준을 따라 간 영국에서 3년 정도 신혼생활을 하며 원베드룸 아파트에서 거대한 월세를 미스터 콘로이에게 꼬박꼬박 냈었는데, 우리는 꼭 8년 만에 다시 월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월세로 매달 내게 될 비용이 그간 주택담보대출로 내오던 이자보다도 훨씬 낮으니 과연 ‘몸빵’이란 걸 할만했다. 만 8년 만의 월세살이, 꼭 우리 아이의 나이와도 같았다. 아이가 5살 무렵부터는 전세이긴 했지만 수도권의 신축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는데, 아이가 자라 기억이란 걸 가지게 된 이후 처음으로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하나뿐인 귀하디 귀한 외동딸아이,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은 아이, 그 아이가 난생처음 살아보는 복도식의 아파트는 20년 전 입주 당시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인테리어를 단 한번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짝반짝한 새집,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바로, 비를 맞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기억을 가진 초등 아이가 그런 집으로 거주를 옮기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나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실은 아빠가 육아휴직 한 게 아니라, 실직하거나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기울어 이런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거라 여기면 어떡하지?’     


민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아이 방만은 깨끗하고 예쁘게, 아이가 혹여나 슬퍼하지 않도록 잘 꾸며주자고 했다. 더 좁은 평수로 이사가게 되었지만, 다행히 아이 방은 이전보다 조금 더 넓었고 아이가 두 살 때부터 써오던 난간이 있는 어린이용 침대를 청소년 시기까지 쓸만한 하얀색의 예쁜 침대로 바꿔주었다. 나머지는 가성비 인테리어라면 일가견이 있는 내가 도맡기로 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막대한 부? 혹은 대치동이나 목동 같은 최고의 교육환경? 아이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 물질적인 유산이나 희생하겠다는 마음 같은 것은 우리가 뼈 빠지게 노력한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은, 그러니까 때려 죽어도 못한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들이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유산은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나뿐인 우리의 아이 아인이가 민준과 나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그게 무엇이든 열심히 해내는,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계속해서 사랑하려는 부모라고, 그런 어른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한번 이겨낸다고 해도 삶의 고난은 언제라도 다시 닥쳐올 것이기에 삶의 그런 순간마다 엄마 아빠의 지난 모습들을 떠올리며 힌트를 얻고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크기를 바랐다.

민준의 꿈이 아이와 본인 자신을 위해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아이 본인이 원하는 일과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뒤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라면, 나는 아인이가 내가 좋아하는 일, 글 쓰는 일을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해나가는 엄마로 봐주기를 바랐다. 그 결과나 끝이 꼭 성공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 그 자체를 즐기며 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사람이고, 언젠가 아인이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서 살아보는 것은 아인에게도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결핍이 없는 요즘 아이들, 그래서 버릇도 없고 자기주장만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요즘 아이들처럼 키우지 않으려고 언제나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주체할 수 없는 애정에 자발적인 노예나 집사로 사는 부모가 되지 않으려고 동시에 있는 힘껏 애썼다. 누군가는 아이가 애초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것 자체가 인생의 큰 치트키 하나를 갖고 태어난 거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부산에서 나고 자라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서울에 온 엄마, 아빠가 이 낯선 도시에서 살아내 보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보려고 노력하며 사는 모습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것은 아이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 것이기에. 민준과 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 결과가 어떻든 치열한 이 수도의 삶 속에서 그게 무엇이든 열심히 끝까지 해본다는 태도를 배운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이야 말로 아이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태도로 녹아들 진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야 속이 편했다. 나 역시 깨끗한 아파트가 좋고, 넓은 집이 좋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어쨌거나 이삿날은 다가왔고, 우리는 오래된 노란 화장실 타일과 오래되어 문틀이 뒤틀려 제대로 닫기지도 않고 삐거덕거리는 방문, 이전 거주자였던 할머니가 집 곳곳을 보수하려 붙여놓은, 그녀가 너무도 사랑했던 노란 박스테이프로 치장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처음엔 내 몸을 뉘우고 내 몸을 씻기고 내 가족의 입에 넣을 밥을 해 먹는 공간의 풍경이 확연히 바뀐 것에 당연히 우울했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아주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그것보다 더한 고난이 이 아파트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20년 된 구축 아파트의 승강기 교체 시점이 마침 우리 이사 즈음에 예정되어 있었고, 하필 우리 동의 공사가 이삿날과 겹치며 한 달간 폭염 속에서 20층을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전 저층에서 살며 언제든 계단을 솔랑 하고 내려가 쓰레기를 버리고 집 앞 편의점에 필요한 걸 가뿐하게 사 오던 일상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온몸이 땀에 젖도록 헉헉대며 욕지거리 나오는 상태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에어컨을 풀파워 상태로 틀 때마다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지구를 부숴버릴 만큼 후덥지근한 사우나 속에서 한줄기 시원한 에어컨과 선풍기 바람을 쐬게 되었을 때 그것은 행복이 분명했다. 좁디좁은 부엌에서 남편과 몸을 부딪혀가며 같이 한 끼 먹을 음식을 만들어내고, 겨우 테트리스하듯 구겨 넣은 가구들 복작복작한 거실에서 같이 넷플릭스 한편을 보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분명했다. 6평 더 넓은 집에서는 전혀 행복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느껴보지도 않은 새로운 종류의 행복이었다. 그것이 굳이 따져 객관적인 행복의 한 장면이 아니었더라도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내가 생각하게 되자 놀랍게도 그것은 나의 사전에서 행복의 한 모습이라고 정의되었다.       


휴직한 남편과도 온종일 붙어있고, 집 안에서도 셋이 복작복작 붙어있게 되었지만, 이전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불행하다 느꼈다. 깨끗하고 편안하고 스마트했던, 핸드폰으로 모든 것이 조절가능했던 내 신축 아파트는 여전히 최고가를 갈아치우며 가격을 올리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내 명의의 집 하나가 더 생겼고, 지금은 그저 잠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마침내 이 지독한 여름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가 끝났고, 신축처럼 번쩍번쩍한 새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했다. 환호성을 질렀다. 깨끗하고 좋은 나의 새 집에서는 맥시멀리스트 인테리어로, 온갖 예쁜 쓰레기들로 집을 채우면서도 30평 좁다고 느끼며 살았는데, 24평의 오래된 집에서 나는 물건을 비우는 법을 배우고, 계단이 아닌 엘리베이터로 집에 올라가고 땅으로 내려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했다.


폭염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간간히 아침저녁으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되찾은 문명의 이기와 함께 나는 마침내 뜨거운 여름을 통과해 이곳에 있었다. 나와는 다른 행성의 조상을 가진 게 분명한 한 남자와 함께, 그 남자와 함께 이 세상에 내놓은 아이 하나와 함께, 이곳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또한 가을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좋아요와 댓글은 식빵작가가 계속해서 다음화를 쓰는데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 연재소설은 박식빵 작가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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