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by 맨오브피스

베를린 하케셔막트(Hackescher Markt)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마리엔키르헤(Marienkirche)라는 교회가 나온다. 두 지점 사이에 사무실 건물이 하나 있다. 내가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근무했던 사무실이다. 그곳에서 일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나의 책상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구석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매출 리포트를 체크하다가, 이메일을 쓰다가, 스카이프로 이야기하다가, 캘린더 알림이 오면 미팅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휴게실에서 탁구를 치는 것 외에는 계속 일에 몰입했다. 회사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빠르게 성과를 내야했던 때였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기계처럼 끊임없이 두들겼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자 사무실 부엌 쪽에서 맥주병 따는 소리가 났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목마름이 느껴졌다. 부엌 냉장고로 가 맥주를 한 병 꺼냈다.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의 맥주였던 것 같다. 맥주를 챙긴 자들은 어슬렁 거리며 소파나 기둥에 대충 기댔다.


"애플 펜슬 써 본 사람?"

"너 월셋방은 구했어?"


동료들과 이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대충 마시다 퇴근할 사람은 퇴근하고, 더 마시고 싶은 이들은 계속 마셨다. 아내 덕순이에게 전화해 술을 마시다 가겠다고 알리고 몇 병 더 꺼내 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공짜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찬장에 과자가 있을 것 같아서 다같이 캐비닛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과자는 없고 시리얼 상자만 가득했다. 어쩔 수 없으니 이거라도 먹자며 시리얼을 꺼내고 있는데, 싱크대 위 선반에 놓인 위스키 병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마침 맥주가 지겨워진 참이었다. 우리는 찬장에서 빈 그릇과 에스프레소 잔을 꺼냈다. 빈 그릇에는 시리얼, 에스프레소 잔에는 위스키를 채웠다. 엄지와 검지로 잔 손잡이를 잡고, 떠들썩하게 건배를 한 후 쭉 들이켰다. 얼음 없이 미지근하게 마셔서 그런지 속에서 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렇게 취해가던 도중 일이 터졌다.


동료 하나가 유독 심하게 취해 있었다. 술뿐만 아니라 대마초까지 피워서 과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베를린은 대마초 흡연에 꽤 관대한 도시다. 주말에 거리를 걷다보면 대마초 냄새를 맡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는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뭔가를 발견했다. 깡통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우와, 안개 폭탄이 있어!!"


깡통을 자세히 보던 그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안개 폭탄은 야외 콘서트장 등에서 사용하는 파티용품으로, 터트리면 연막탄처럼 진한 색의 연기가 터져나온다. 다만 연막탄과 달리 색깔이 선명해서, 여러 명이 동시에 터트리면 꽤 멋지다. 그가 들고 있는 안개 폭탄에는 오렌지색 라벨이 붙어있었다.


"당장 그거 내려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는 그 깡통을 흔들어 터트렸다. 슈우욱하고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그는 깡통을 탁구대 위로 던졌다. 탁구대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깡통에서 오렌지색 연기가 자욱이 뿜어져나왔다. 사무실 안이 순식간에 오렌지색 연기로 가득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몇 분 후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술이 확 깼다.


우리는 일단 밖으로 도망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창문에서 예쁜 오렌지색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연기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옆 건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옆은 호스텔 건물이었다. 화재경보 소리와 오렌지색 연기에 놀란 호스텔 직원들이 투숙객들을 전부 로비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5분 후 소방차와 경찰차가 도착했다(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자동으로 소방서에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경찰관, 소방관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올라갔다. 빈 맥주병이 굴러다녔고, 독한 냄새를 풍기는 에스프레소 잔과 제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낸 안개 폭탄이 있었다. 그들은 적당히 둘러보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도 따라 내려갔다. 길가로 나가니 호스텔 직원 한 명이 모두를 초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관님, 저 멍청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실거면 따뜻한 저희 로비에서 하시지요."


로비에 들어가니 수많은 투숙객들이 앉아있었다. 모두 짜증난 얼굴이었고, 죄인처럼 입장하는 우리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숙인채 제일 앞에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경찰관은 우리의 신분증을 확인한 후 각자의 주소를 수첩에 옮겨적었다. 그런 뒤 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경찰관은 우리의 알콜농도를 측정한 뒤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집에 가셔도 좋습니다. 대신 나중에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발 파티는 조용히 합시다."


소방차도 떠났다.


우리는 호스텔 사람들에게 사과한 뒤 건물을 나왔다.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다들 허세를 부렸다. 나도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웃었다. 속으론 남에게 피해주는 외국인 젊은이1이 된 것 같아 찝찝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인사한 뒤 집으로 향했다. 혹시 이번 일로 취업 비자가 취소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기물 파손도 없었고, 화재가 난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다가도, 독일 사회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놈이라며 쫓아내면 어떻게 할지 걱정됐다. 집에 들어가니 덕순이는 자고 있었다. 맴도는 걱정을 쫓기 위해 얼른 침대에 누웠다. 유럽 애들은 취업 비자 없어도 돼서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날 대표는 우리에게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벌금을 내라면 내야지 어쩌겠냐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벌금 고지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 사건은 우야무야 잊혀졌다. 나의 취업 비자도 다행히 취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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