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보내주세요

by 맨오브피스

독일은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으니 나의 연봉도 높아지겠지? 돈 때문에 해외로 나가려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돈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 직후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내가 해외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뭔가 새로운 것을 기분좋게 상상하다가, 현실의 벽을 걱정한다. 대학 가면 맨날 게임해도 괜찮겠지?로 시작했다가, 그런데 내가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까?로 끝나는 패턴. 이럴 땐 깊이 생각하지 말고 바로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생각만 하다 보면 배만 고프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해외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추려봤다. 영업은 하기 싫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반대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가지를 파고드는 게 더 즐겁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개발자였는데, 나는 개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임을 하면서 컴퓨터 관련 잡지식은 나름대로 쌓였지만 잡지식은 팔아먹기 힘들다. 앱 개발이라도 배워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나는 당장 해외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개발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따져봤다.


현재 나의 일은 고객 관리 일이니 고객 관리 일을 찾으면 된다. 게임을 좋아하니 게임 관련 회사에 지원하면 유리할 것이다. 마침 첫 직장이 독일 게임 회사였으니, 미국보다는 독일이 나을 것이다. 어릴 때 프랑크푸르트에 살았던 적이 있어 독일이 더 친숙하기도 하다(어릴 때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어차피 미국은 취업 비자 발급이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최종적으로는 독일을 목표로 잡았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중 지름길을 하나 발견했다. 지금 나의 직장은 독일 회사의 한국 지사다. 본사는 독일 베를린에 있다. 그럼 독일 취업을 처음부터 알아볼게 아니라, 본사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겠네? 1부터 시작하는 본격 해외 취업 루트는 아니었으므로 누군가는 진정한 해외 취업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진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단 얘기부터 꺼내기로 했다. 당시 한국 지사의 대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터놓고 이야기했다. 꼭 해외에 가야겠다고, 방법이 없겠냐고 졸랐다. 나는 긴장을 잘 숨기지 못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늘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베를린 본사와 이야기해본다며 면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본사와 할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많을까. 혼자 속을 태웠다. 지사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신경쓰였다. 그가 화장실을 갈 때도 눈길이 갔다. 언제 말해줄 거냐며 눈으로 재촉했다. 겉으로는 여유있게 행동했지만 아마 표정에 드러났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구글 문서 링크였다. 문서를 열어보니 처음 보는 회사의 로고가 여러 개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문서에는 어떤 로고가 마음에 드는지 투표하는 칸이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로고를 훑어보다가, 파란색 네모가 그려진 로고를 골랐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드디어 지사 대표와의 면담 시간이 왔다. 나는 그에게 본사와의 대화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다. 그는 자리가 하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호들갑을 떨면서 질문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얼마 전에 받은 로고 고르는 메일 기억나지? 베를린 본사에서 사내 스타트업을 하나 만들거야. 거기에 가도 괜찮다면 내가 잘 이야기해볼게."


사내 스타트업? 회사 안에 회사를 세운다는 건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갈 수 있다면 그냥 어떻게든 가자. 그리고 며칠 후, 내가 원한다면 베를린으로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퇴근 후 집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부모님에게 들뜬 기분을 쏟아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성취감이었다. 수 년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 지사 대표가 나를 매우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나의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베를린 행이 잠정 확정되었다. 독일에서 일하려면 독일의 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 한국 지사는 퇴직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독일 본사와의 근로계약서를 새로 쓰기로 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연봉 금액이 포함되어야 한다. 연봉협상도 새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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