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화를 거는 곳

소통의 난해함에 대하여

by 장동혁

* 1970년대 미국


1970년대 미국은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과 기술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꺼져가던 시기다. 동시에 향락과 상업자본주의의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젊은이들의 반전 시위와 함께 넘쳐나는 소비재 광고가 동시에 송출되었다.


이때 간결한 문체로 삭막해져 가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작가가 있다. 레이먼드 카버다.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묘사해 이야기를 만들어 갔고, 간결하지만 울림이 큰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였던 그는 그렇게 미국 단편소설의 중흥을 이끌었고, 유난히도 단편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을 모아 엮은 <대성당>은 파편화되어가는 사회의 단면과 소통의 난해함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 하나.


부부싸움중 문을 박차고 나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나야...”


이 짧은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중 무엇일까?


1. 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인간 ‘000’이다.

2. 우리 이제 그만 풀자.

3. 나 있잖아. 요즘 많이 힘들어.

4. 그냥 네가 좀 더 나를 이해해주면 안 되겠니?


정답은?

없다! 아니 모두가 정답이다.

어쩌면 네 가지 의미가 조금씩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다양한 재료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상큼한 토닉워터 맛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달콤한 버번위스키 향을 느낄 것이다. 역한 알코올 맛만 느껴진다면 그건 문제다.


대화 도중 나가버린 남편에 분이 덜 풀렸다면, 적반하장 격으로 이해해 달라는 남편의 말에 분노할 것이고,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싸늘한 밤거리를 헤매었을 남편이 맘에 걸렸다면 3번의 의미로 다가올지 모른다.




이처럼 하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네 가지 의미가 담길 수 있다. 사실적 정보와 나의 표현, 상대에 대한 바람 그리고 둘 간의 관계. 듣는 사람 역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심지어 말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정확히 모르기도 한다. 잘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말한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해석이 잘 들어맞는 거다.


하나 이는 서로 충분히 만족할 때나 가능하다. 조화(harmony) 말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런 관계는 드물다. 만난 지 2주 정도 된 남녀 사이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다. 별점 한 개 반짜리 식당에서도 물개 박수가 터지는.


그 반대가 훨씬 많음을 우리는 잘 안다. 불화(conflict) 말이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정보를 전했을 뿐인데 기대로 받아들여 부담스러워하는가 하면, 숨겨진 바람을 단순 정보로만 읽고 복장 터지게도 한다. 폭력을 쓰지 않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평화(peace) 상태만 유지되어도 다행이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지금 노란불인데”라는 말을 신호등 색깔에 대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똑바로 운전하라는 경고 일수도 있고, 신호를 밥 먹듯 어기는 불량 운전자라는 비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내로서 존중해달라는 표현일 수도 있고.


표현과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지역마다, 문화마다 다르며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어렵다. 비행 패턴 몇 개로 실수 없이 정보를 전달하는 꿀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야”
-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레이먼드 카버 -


센터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다가 외출을 허락받은 남자가 기쁜 마음으로 전화 부스로 달려간다. 기쁜 마음을 누구에게 전할지 순간 망설인다. 이미 다른 남자의 사람이 되어버린 조강지처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애인을 사이에 두고서. 다이얼을 돌린 뒤 꺼낸 첫마디가 “나야”다. 힘들다고 떠난 사람이 느닷없이 전화해서 던진 말이다.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과의 설레는 대화를 꿈꾸며 전화기를 들었다가, 한 때 자기를 위해 양파를 썰고 토마토소스를 볶았을 옛 연인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만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고개 든 양심에게 일격을 당한 것이다. 무슨 말부터 시작할지 난감한 남자의 가라앉은 마음이 보인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이 외마디 말과 함께 끝을 맺는다. 마지막 한 마디는 그 어떤 긴 이야기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여하튼 시간의 간극으로 어색해진 상대에게 꺼낼 유용 하면서도 가장 적합한 말이긴 하다. 잊을만하니 다시 말을 걸어온 남자의 이 한 마디를 여자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녀는 그가 소파에 앉아 책을 집어 드는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늘 보던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나 곧 그는 책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그의 머리가 소파 팔걸이에 놓인 베개로 내려가는 모습을 봤다. 그는 머리 뒤로 베개를 받친 뒤, 두 손으로 목을 괴었다. 그렇게 그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팔이 몸 옆으로 내려가는 걸 그녀는 봤다.
- <보존> 레이먼드 카버 -


하필이면 찌는듯한 더위에 고장 나 멈춰버린 냉장고. 그걸 들어내고 그럴싸한 것으로 하나 놔줄 수 없는 무기력한 남자는 그 냥 ‘맨발’로 그려진다. 시위하듯 고기만 구어 대는 무언의 압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소파로 돌아간다. 주요 기능을 잃고 의기소침해진 남자가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다.


무안함을 백허그로 무마하는 것도 구실을 할 때나 가능하다. 소파 양 끝으로 드러난 초라한 정수리와 발끝이 그의 전부다. 제 기능을 잃을 때 보잘것 없는 정체성마저도 휘발되어버린다.


온종일 티브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아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커피를 데워놓는 일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기능이다. 남편이 데워 놓은 커피 향은 과연 어떻게 해석될까. 이런 상황에서의 소통은 엇나가기 일쑤다.


하지만 비타민을 공짜로도 주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못한 여자들은 그냥 그만두곤 했다. 그냥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전화가 있는 경우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문을 두들겨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여자들이 갈 길을 잃은 개종자라도 된다는 듯이 패티는 그 상실감을 마음에 담아뒀다. 그녀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이겨냈다. 너무나 많이 당하는 일이라 이겨내지 않을 수 없었다...
-<비타민> 레이먼드 카버-


머리에서 약 냄새가 모락모락 올라올 정도로 비타민 판매 영업에 몰두하고 있는 부인이 남편은 두렵다. 언제 신세한탄이 우박처럼 쏟아질지 모른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뿔이난 아내가 남편을 몰아붙인다. 궁색해진 남편이 궁리 끝에 꺼낸 말은 “알 듯 말 듯하네”다. 복장 터질 아내도 공감되지만 궁지에 몰린 남편의 처지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깃털>의 부부처럼 간혹 시도해 보는 소통 역시 엇나가기 일쑤다.

직장 동료의 초대로 도심지를 벗어나며 펼친 남편의 교외 예찬론은 “깡촌이네”란 부인의 한마디에 정리돼버린다.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맹인 불청객과의 동석으로 인한 따분함과 어색함을 풀어보려 켠 티브이에서는 하필 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다.<대성당>. 난감하다.




공동체가 개인의 삶으로 파편화되어버린 시대.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기 위해 창조된 언어마저 파편화된다. 작품에서 언어는 서로를 이어 주기보다는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고 상대를 배척하는 기능으로 축소된다. 그러다 보니 소통은 공허하고 엇나가기 일쑤다. 게다가 각박하고 삭막한 사회는 그 현상을 가속화한다.


제동장치 없어 보이는 이 불길한 현상을 막아 반전을 일으킬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다. 그나마 공동체 안의 온기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카버는 a small, good thing을 제안한다.


아들의 사고로 괴로워하는 고객을 위해 롤빵을 구워 전하거나, 천 길 이질감이 느껴지는 맹인의 권유에 따라 눈을 감고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보는, 별것 아닌 것 같은 그런 일들 말이다.



일본인 지인이 웰컴 푸드로 만들어준 덴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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