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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Feb 04. 2024

벽지하나 내 맘대로 못 고르는 바보병신

<K장녀 해방일지> 마흔에 나는 나로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꾸미는 데 한창 집중하던 때의 이야기다.

다른 때도 아닌 내 첫 살림이기에 예쁜 벽지와 깔끔한 장판으로 교체하고 싶었다.

한두해 만에 팔색조로 기술이 바뀌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전문 인력 앱 보다 사람들의 발품과 입소문으로도 업체를 많이 찾던 때다


이사와 인테리어 경험 노하우가 축적된 엄마께 여쭙고 싶었지만 엄마는 하나를 물으면 너무 깊고 강하게 간섭하는 터라 주저했다. 그렇지만 나도 처음 대면하는 인테리어 영역이라 패키지로 따라오는 불편함은 잘 대처해 보기로 하고 엄마께 잘 하는 인테리어 업체를 아시는지 여쭈었다. 역시나 엄마는 작전팀 수행요원처럼 이모들 연락망에 접촉해 신속하게 정보를 알아오셨다.



'종로에 방산시장 어디 가게 사장님!'


그러면서 신혼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바가지 씌워질 수 있다며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누구 소개로 전화했는데요, 저렴하고 좋은 벽지 소개 좀 해주세요."

라는 아기에게 당부하는 듯한 대본까지 주셨다. 간섭과 무례한 기운이 스멀스멀 도는 걸 감지했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엄마는 나와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차를 돌려 방산시장으로 향하셨다.

벽지 가게를 둘러보자는 거다. 여러 군데를 둘러보시더니 한 곳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셨다.


사장님은 두꺼운 벽지 앨범 몇 개를 가져오셔서 원하는 벽지를 골라보라고 하셨다.

그때 당시 포인트 벽지가 유행이었는데 나는 거실 한쪽 면을 민트색으로 꾸미고 싶었다.

신혼의 싱그러움을 표현할 수 있고, 또 신혼 때 아니면 해보기 쉽지 않은 칼라여서다.

앨범을 훑어보니 디자인 샘플이 너무 많아 구경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애써 고른 민트색 벽지를 하지 말라셨다.


"무난하게 흰색 벽지를 하는 게 깔끔하고 이뻐. 민트색은 결국 질려."

"질려도 해보고 질릴래. 신혼 때 아니면 못할 것 같아."

             

 

실랑이가 길어지자 뒷짐을 진 가게 사장님은 중간중간 끼어드셔서

'자녀분이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하세요 허허.' 라고 하시며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가셨지만 장시간이 흘러도 엄마와 나의 의견은 모아지지 않았다.

결제할 경제권은 내게 있었음에도 엄마께 강하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옥신각신하고 앉아있었다.


대화를 듣다 못한 사장님은 내 편을 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님, 솔직히 신혼집 누가 사는 집인 지 모르겠어요~!

자녀분이 원하는 걸로 골라야죠."


엄마는 팔짱을 끼고 입을 앙 다무시더니 낯빛이 어두워지셨다.


"사장님, 흰색으로 해주세요."


나는 결국 이렇게 말씀드리고 승리의 표정을 안은 엄마와 가게를 떴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까지 내가 살 집에 벽지 하나 내 맘대로 못 고르는 바보 병신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처음부터 아예 물어보지 말았어야 하나. 오랜 지혜를 어깨너머로 배우면서도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하며 살아가는 일은 안되는 건가. 엄마와 딸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아기자기하게 데이트하는 시간을 보내는 게 왜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 걸까. 다른 어른들과는 그렇게 지내면서 딸 하고는 그게 왜 안되는 걸까. 나는 왜 더 강하게 의견을 말하고 자리를 빠져나오지 않았을까.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지막으로 고찰해야 하는 시점에 벽지를 파먹고 앉아있었다.

 

결혼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하나의 가정을 꾸린다는 의미다.

신혼집은 실거주 할 신혼부부가 원하는 데로 인테리어를 하는 게 맞다.

부모는 체면과 소유욕을 버리고 자녀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엄마의 엄마는 전쟁통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가 형제를 잃는 경험을 했다.

미리 짐을 챙겨 일어나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으면 피난지로 떠나는 배가 눈앞에서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침투한 화학약품의 소멸에는 반감기가 있지만 인간의 뇌에 침입한 불안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배가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벽지 잘못 골랐다고 가족을 잃을 염려는 없다.

벽지 하나 잘못 골랐다고 사회생활 제대로 못 할 일도 없다.

시행착오를 겪을수록 삶의 능통과 만족으로 가는 열쇠를 얻는 귀한 경험일 뿐이다.

 

 


그림)

그래서 신혼 집 벽이 흰색이었냐고요? 아닙니다.

벽지 가게 나오기 직전에 사장님께 귓속말로 "민트요~" 하고 나왔습니다.

사장님은 미소로 알겠다고 답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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