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임 May 15. 2024

기억 속 첫 번째 선택 |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선택의 순간에 휘말리기에 앞서 선택의 결과를 우선 생각한다.

꼬꼬마 시절의 어느 설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던 친척 어른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우선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겨보려 했다.

말없이 웃다 보면 어른들 중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주시겠지.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됐다. 

시끌벅적하던 방안의 소음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던 어른들 그리고 갈색 담요 위에서 신나게 화투 치던 어른들까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 장면이 한 장의 스틸 사진처럼 떠오른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빠가 바로 옆에 있었고 엄마가 음식을 들고 막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 웃기만 했다.

이번엔 다른 어른이 재촉했다.

"뭘 그렇게 웃고만 있어? 그냥 엄마면 엄마, 아빠면 아빠. 대답하면 되지~"

나는 다시 한번 엄마, 아빠 둘 다 좋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많던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재미없네 재미없어. 그래도 둘 중에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냐~?"

엄마, 아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질문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엄마가 들고 온 과일과 안주를 상 위에 놓으며 선택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위해 구명 튜브를 던졌다.

"에이~ 애 곤란하게 왜 그래요~ 둘 다 좋은가 보지 뭐. 싱거운 질문 그만하고 어서 과일이나 먹어요"

"아 그래, 안주 먹어야지. 안주. 근데 저 녀석 참 재미없네~ 허허"

기대에 활활 타오르던 어른들의 눈빛은 금방 원래의 온도를 되찾았고, 다시 방안은 어른들의 목소리와 '착' '착' 화투가 부딪히는 소리로 채워졌다.

나는 상황이 끝난 후에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는 "학교에서 공부 잘하냐?" "여자 친구는 생겼니?" "올해 몇 학년이지?"처럼 오랜만에 만난 아이에게 건네는 어른들의 인사 매뉴얼 같은 거였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에 나에겐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질문하는 어른이 친가 친척이면 '아빠'라는 대답을 원했을 거고, 외가 친척들이면 '엄마'라는 대답을 원했을 거지만, 나는 다른 한쪽 부모님을 서운하게 하면서까지 친척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황희정승과 검은소, 누렁소 일화를 이야기해 주셨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황희정승이 길을 걷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검은 소와 누렁소를 발견하고, 그 소의 주인에게 질문한다. "저기 저 소 두 마리 중에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는지요?" 그 질문에 농부는 황희정승에게 귓속말로 누렁소가 더 일을 잘한다고 대답한다. 농부의 그런 행동에 황희정승은 말도 못 알아듣는 소 앞에서 왜 귓속말을 하냐고 되묻자, 농부는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거나 흉보면 기분을 상해한다고 황희정승에게 대답한다. 농부에게 그런 말을 듣자 황희정승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


나는 이 일화를 듣자마자 머리 위에 전구가 반짝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 당시 만화책에선 주인공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항상 머리 위에서 전구가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명절에 어른들이 또다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면 이 이야기를 써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명절이 되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어른들은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우선 엄마, 아빠 두 분 다 좋다고 대답했고 여전히 실망감을 보이는 어른들에게 학교에서 들은 황희정승 이야기를 덧붙였다.

"황소도 둘 중에 하나가 더 낫다고 하면 기분이 상한다는데, 제가 만약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한 사람만 선택한다면 나머지 한 사람이 기분 상하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나는 계속 엄마, 아빠 둘 다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혹시라도 건방져 보일까 싶어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그분들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행히 친척 중에 한 분이

"이놈 이거 완전 애늙은이처럼 말하네. 애늙은이네. 애늙은이야!" 하면서 상황은 끝이 났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나는 친척 어른들 사이에서 '애늙은이'라고 불렸다.

물론 매년 반복되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의 블랙홀에서도 해방되었다.

사실 나라고 엄마, 아빠 중에 더 좋아하는 쪽이 없었을까. 하지만, 매일 동생과 나를 위해 집안일에 부업까지 하시던 엄마와 직업의 특성상 밤낮으로 일하시던 아빠. 두 분 모두 가족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만 선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 앞에 무조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 특히 타인의 압박이 동반된 선택지는 더욱 그러하다 -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위기에만 휩싸여 성급하게 한쪽을 선택해 버리면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물론 아이가 엄마, 아빠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한다고 무슨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질까 싶지만 사람의 속마음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내가 우려했던 건 내 선택에 따른 불이익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상처였다. 

괜히 같이 살지도 않는 어른들의 장난에 부모님 두 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던진 선택지가 아닌 둘 다를 고집했다. 


그렇다고 훗날 내 아이도 나처럼 대답하기를 바라진 않는다.

내 아이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엄마'라고 대답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나처럼 이런저런 점을 감안해 '둘 다'라고 대답해서 계속되는 어른들의 질문에 곤란해한다면 그 모습이 나는 더 신경 쓰일 거 같다. 그 순간의 난처함을 나는 잘 아니깐.

아직 미혼이라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지인들의 모임에서 나는 가끔 같은 상황을 목격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는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어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통된 질문인가 보다.

어떤 아이는 어른들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요!' '아빠요!'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대답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어린 날의 나처럼 '둘 다요'라고 말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본다. 

그런 녀석을 보면, 나는 지난날의 내가 생각나서 "OO 이는 엄마는 엄마라서 좋고, 아빠는 아빠라서 좋은 거지? 엄마, 아빠는 OO 덕분에 행복하시겠다"라고 끼어들기도 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곤란한 질문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게 구명 튜브를 던져줬던 그날의 엄마처럼.

그러고 보니 엄마도 어린 시절 나처럼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어서 그날의 나에게 구명 튜브를 던져주셨던 건 아닐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전 01화 인생은 선택의 점들로 이어진  곡선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