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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Oct 26. 2024

가시처럼 마음에 걸린 칭찬 “잘하셨어요”

그 해 겨울, 나는 전기장판과 사랑에 빠졌다. 회사 숙소에서 사용하는 중앙 난방기가 고장 났다. 방 안은 금세 냉기로 가득 찼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찬 공기가 들이닥쳤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이불을 단단히 둘러매도 차가운 기운을 막을 수 없었다. 하룻밤을 덜덜 떨며 보내고 날이 밝은 대로 근처 가전 매장에 달려가 전기장판을 구매했다.


그제야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 없는 밤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도 빠진 듯 나는 새벽 시간 어슴푸레 잠에서 깰 때면 품 안에 느껴지는 따뜻함을 그러안곤 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을 비비고 있노라면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 온기를 즐기고 있을 때 유독 달갑지 않은 녀석이 있었으니, 눈치 없이 울려대는 알람이었다. 필사적으로 “5분만 더”를 외쳐봐도 소용없었다. 융통성 없는 녀석. 한치 오차 없이 나를 다그치는 놈이 잔인하게까지 느껴졌다.


'아, 좀 봐달라고.'     

그날도 날카로운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외투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고 어둑한 골목길을 나섰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팔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간담이 서늘해져 바라보니 웬 할머니가 서있었다.

"왜 그러세요?"

"내 집 좀 찾아줘. 잠깐 바람 쐬러 나왔는데 길을 모르겠어."     


특유의 멍한 눈동자에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 나는 할머니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녀와 나 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잠옷 위에 걸치고 있는 분홍색 경량 조끼밖에 없다는 사실. 그녀는 지갑도 핸드폰도 심지어 그녀 자신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다.     

'어떡해야 되지?'

고민하는 와중에 저 멀리서 출근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순간 어떤 힘이 나를 지배라도 했는지 의식하기도 전에 내 몸뚱이가 정류장을 향해 튀쳐나가기 시작했다.     

'버스가 신호 걸린 틈이면 충분히 정류장까지 도착할 수 있어!‘     

달리는 와중에도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작동했다. 전력질주를 하는데 맞받아 치는 겨울바람이 세차게 따귀를 때렸다. 볼이 터질 듯이 시렸다. 잠시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버스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여유가 있어 멈춰 선 채 가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얼어붙은 뺨을 손으로 녹이다 문득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분홍색 경량 조끼. 그 얄팍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크게 한숨이 나왔다.

'오늘 지각은 확정이다.'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지각을 감수한 이상 나는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건너편 정류장에 누군가를 발견했다. 할머니였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그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그녀 곁에 다가가 112 신고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지 능숙하게 할머니를 모셨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한 경찰관이 내게 다가와 인사말 한 마디를 남겼다.     

"잘하셨어요."


그 한 마디가 이상하게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왜지? 상황을 곱씹던 나는 얼마 안 있어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내게 도움을 청하는 할머니를 은근히 귀찮게 여겼다. 추위 속에서 경량 조끼 하나 덜렁 걸친 그녀를 내팽개치려 했다. 그런 주제에 경찰관이 '잘하셨어요'라고 말해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얄팍한 인간.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였다.


찜찜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는데 언젠가 봤던 뉴스가 떠올랐다. 지하철역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노인. 주변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노인을 슬쩍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심지어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모두들 제 갈 길을 서둘러 떠나버린다. 나는 그 차가움이 이해되는 듯했다. 뉴스 속 사람들도 나처럼 어떤 힘에 지배당했던 건 아닐까.


잊어가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마음이 서늘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잊은 채 버스를 타려는 할머니. 누군가를 돕는 법을 잊은 채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비슷할는지도 모르겠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궁금증이 들었다. 정류장에서 할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려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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