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칭기즈 칸의 우람한 청동 좌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동상은 몽골인에게는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 그 자체다. 우리가 광화문의 세종대왕상이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을 대하듯, 그들은 칭기즈 칸을 통해 자긍심을 느낀다. 과연 그의 어떤 업적이 그를 이토록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칭기즈 칸 리더십의 요체가 궁금하다.
칭기즈 칸은 1162년 부족장의 아들 ‘테무진’으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독살과 포로 생활 등의 시련 속에서도 그는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초대 황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며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기즈 칸이 황제에 오른 1206년보다 1427년 앞선 기원전 221년, 중국에서는 진시황제가 500년간의 춘추전국시대 대혼란을 끝내고 최초로 통일제국을 건설했다. 진시황제는 영토적 통일 외에도 중앙집권제와 도량형 통일을 통해 문화적 통일도 이룩했다. 그러나 분서갱유와 같은 상상할 수 없는 폭정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진시황제는 강력한 통치를 펼쳤지만, 그의 사후 진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반면, 칭기즈 칸은 황제가 된 후 21년간 중앙아시아 전역까지 국토를 넓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 면적이 통일 진나라의 10배가 넘었다고 하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에도 제국은 그의 정신을 계승한 아들 오고타이 칸과 손자 쿠빌라이 칸 등에 의해 더욱 번성했다. 그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시대를 열어 동서양의 교류를 촉진하는 등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제국의 통치 방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에 기반한 가혹한 법치로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몽골은 유목민의 전통을 존중하고 제국의 질서 유지를 목표로 한 실용주의적 법체계, 즉 야삭(Yassa)을 만들었다. 진나라의 법이 군주와 절대 권력을 위한 것이었다면, 몽골의 야삭은 백성의 통합과 제국의 질서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군주의 리더십 스타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진시황제가 백성을 억압하는 군림형 리더였다면, 칭기즈 칸은 직접 전쟁터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는 솔선수범형, 소통형 리더였다. 그는 6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1227년 실크로드의 핵심 구간인 서하 왕조 원정 중에 전사할 만큼 평생 전장을 누볐다.
공산주의 시절 잠시 외면되었던 칭기즈 칸이 몽골의 민주화 이후 다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런 위대한 업적과 소통의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