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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경 Mar 21. 2024

수모 없는 수영인의 회식

같이 수영하는 사이에서 같이 회식하는 사이로

"요즘은 회식이 그리워요."

"그럴 땐 절 부르세요."

"아니, 둘 말고 왁자지껄 여럿이 하는 회식이요."

"아."

몇 달 전 1인 출판사를 하는 편집자님과 나눈 대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학사전에서 회식을 찾아보았다. 회식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음. 또는 그런 모임.'이란다.


나 역시 퇴사 후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그리움. 왜 회식이 그립지? 삼겹살에 쏘맥 지겹다고 했던 게 나 아니었어? 그 많은 쏘맥을 마느라 손목이 나간다고 불평했던 게 나 아니었냐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했다. 나 외롭구나. 혼자 일하는 게.   


회사는 다시 다니기 싫은데 회식은 하고 싶었다. 때때로 신문사, 잡지사 등과 일을 할 때 회식자리가 생기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코로나19는 그런 회식 자리마저 내게서 앗아갔다. 남편과 둘이 부부회식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둘이 먹고 마실 것을 부부회식이라 이름 붙일 뿐이었다.  


"상급반이 회식했데. 우리 중급반도 회식해요. 회식"

내 귀에 '회식'이란 두 단어가 콕 박힌 것은 지난해 어느 가을 아침 댓바람부터였다. 막 친해진 수친 H가 샤워실 앞 탈의실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회식 타령을 했다. 반가운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H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H가 노래하듯 말했다. "언니, 우리도 회식해 회식!"


수친 H의 타령으로 끝날 것 같은 회식은 연말을 맞아 급물살을 탔다. H가 지나가는 말로 연말에 뭐 하냐는 수영 강사님을 회식에 섭외한 것이다. H는 아침 7시 중급반 사람들을 붙잡고 일일이 회식을 한다고 이야기했다.


H가 애쓰는 모습에 감명받은 또 다른 회원분도 회식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나도 H의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수영 강습 때 늘 앞이나 뒤에 서는 회원에게 다가가 쓱 말을 걸었다.

"00일에 시간 돼요? 우리 중급반 회식한데요."

"우와 회식이요? 저 코로나 때 수영 시작해서 회식 한 번도 못해 봤어요."


H의 준비는 꽤나 주도면밀했다. 수영 강사님이 참석할 수 있게 금요일 저녁으로 정하고 회식 날짜와 장소를 고지하기 위해 난생처음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까지 만들었다. 오픈 채팅방을 통해 대략 참여할 수 있는 인원수를 파악해 장소도 예약했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까? 막상 회식 날이 되자 이런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술집에 수모를 쓰고 갈 수도 없고. 맨 얼굴에 수영복만 입고 만나던 사람들이 사복을 입고 만나니 어쩐지 어색했다. 한편으로는 역시 사람은 수모를 벗어야 인물이 사는구나 싶었다. 나의 괜한 걱정은 자기소개 타임에서 다 해결됐다. 다들 이런 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중급반 1번 레인 땡땡이 수모 쓴 사람이고요. 이름은 우지경이에요. 프리랜서이고 나이는..."


우리는 서로 어떤 수영복을 입고, 어떤 수모를 쓰는지는 알아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이에서 이름과 나이를 아는 사이가 되어 술잔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수영장에서 숨이 차서 같이 헉헉거릴 때도 동지애를 느껴졌지만, 둘러앉아 서로의 수력과 심박수, 수영복 등 온갖 수영 관련 이야기 하고 있으니 동지애가 최대심박수만큼 상승하는 기분이랄까. 연말기념 중급반 첫 회식은 기분 좋게 2차까지 이어졌다.


"10분, 15분에 수영장 오는 사람들 운동 30분 밖에 못하는 거예요."

라는 수영 강사님 말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비록 요즘은 다시 5분 10분 지각을 하고 있지만, 그날 이후 한동안은 수친들과 새벽에 서로 깨워주며 지각 안 하기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같은 방향이 집인 수친들과 넷이 나란히 걸었다. 동네에서 회식하고 함께 언덕길을 걷는 기분이 밤공기만큼이나 상쾌했다. 번아웃으로 힘든 한 해였는데, 아침에 씻고 책상 앞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고 새벽 수영을 꾸준히 했더니 모든 일을 마무리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친들과 송년회를 다 하는구나 싶었다.   


다음날 아침 해장은 토요일 자유수영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어젯밤 헤어지며 한 약속을 지켰다고 뿌듯해하며 생각했다. 역시 해장은 수영장 물로 해야 제맛이지. 우리 수영장이 다른 수영장 보다 물맛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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