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인이라면 아시죠? 수세권에 사는 맛.
나는 수세권에 산다. 숲세권도 아니고 스세권도 아니고 수세권이란 수영장 가까이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집에서 수영장 입구까지 도보로 10분 거리다. 5년 전 이사 올 때부터 이 집은 수세권이었지만 그때는 집 주변에 수영장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저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10분 역세권 밖에 모르는 뚜벅이였다. 면허는 장롱에 맡겨놓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니는 뚜벅이다 보니 지하철역과 버스 노선이 중요했다.
3년 전 수영을 시작한 후 역세권 보다 수세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나처럼 일주일 중 월, 화, 수, 목, 금 주 5일은 수영 강습을 받고 주 1일(토)에는 자유수영을 하는 생활수영인에게 중요한 건 집과 수영장의 거리다. ‘수세권에 사니 얼마나 좋아. 걸어서 수영장까지 갈 수 있잖아.’ 매일 수영장에 가기만 하면 맛볼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지난해부터 새벽 수영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이른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집을 나서더라도, 수영으로 나를 리셋하며 활기찬 기운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처서 매직보다 놀라운 수영 매직이다.
남의 동네로 원정 수영을 갈 때도 수영장 근처에는 어떤 주택가가 있는지 살펴본다. 서울숲 복합문화 체육센터에 갔을 땐 그 앞에 짓는 신축 아파트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고, 잠실 올림픽 수영장에 가면 이번 생에 한 번쯤은 이 동네에 살며 올림픽 수영장에서 강습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촌의 종로문화체육센터 수영장에 다녀온 후엔 서촌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사모님, 집 팔 생각 없으세요?” 얼마 전에 동네 부동산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든 생각은 저 사모님 아닌데요. 연이어 든 생각은 꽁꽁 얼어붙었던 부동산 시장이 풀려 다시 아파트 값이 전고가를 넘어서는구나. 전세산인 집을 뜯어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까운 미래에 집을 팔고 서울을 벗어나 살자는 남편과 진지하게 계획을 세워야겠구나였다. 그날 밤 나와 남편은 일단 틈틈히 우리가 살고 싶은 소도시로 여행을 다니며 살만한 곳을 물색하기로 했다. 그래서 얼마 전 2박 3일 짧은 여행을 다녀온 곳은 전주다.
왜 전주냐면 KTX로 갈 수 있고 도서관이 많은 데다 50m 수영장이 두 군데나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1층에 바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면 어떨까 상상하며 한옥마을 근처에 묵었다. 푹푹 찌는 더위와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 탓에 생각만큼 많이 돌아다니진 못했다. 덕진 수영장에 가보려고 수영복을 챙겨 갔는데, 수영장이 햇살이 스미는 50m 수영장이 마음에 들어서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도 수영장에 들렀다.
수영복 코디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수영복과 수모는 챙겨 갔지만 수경은 안 챙겨 가는 바람에 안전요원님과 이런 대화도 나눴다.
“안녕하세요. 어제 수경 빌린 사람인데요. 오늘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사실 빌려드리는 수경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어제는 저희 직원 수경 드린 거였어요.”
“아, 죄송해요. 사실은 제가 서울에서 놀러 왔는데 수경을 안 가지고 왔어요. 집에 수경이 4개나 있는데 서울이라 가지러 갈 수가 없어서요. 이 수영장이 너무 좋아서 또 왔는데...”
(어이가 털려)하하하 웃으며 수경을 빌려주신 안전요원님 고맙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초고속으로 합의를 보았다. 한 달 살기든 1년 살기 든 전주에 살게 되면 덕진 수영장 근처에 살기로 의견 일치. 과연 우리는 서울을 떠나서 살게 될 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전국 어디에 살든 이제 집을 보러 다닐 땐 수세권을 찾을 게 분명하다. 수영인에게 숲세권, 스세권, 수세권 그중에 제일을 수세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