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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경 Sep 10. 2024

무섭지만 스타트하는 수영인이 되고 싶어요

의심을 버리고 의지를 키우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수영인이 있다. 물속 스타트를 하는 수영인과 물 밖에서 스타트를 하는 수영인. 물속 스타트와 물밖 스타트는 속도 차이도 크지만 '멋짐'의 차이도 크다. 올림픽처럼 선수들이 출전하는 수영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을 알 것이다. "Take your mark!"라는 멘트 후 스타트대에서 선수들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등에 노란 계란 초밥같은 헬퍼를 달고 유아풀에서 수영을 배울 때 부터 스타트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였다. 난생처음 스타트 수업에 들떴던 것 같다. 겁이 나진 않았다. 그저 멋지게 잘 해보고 싶었다. 다들 배치기를 하면서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나는 배치기를 하지 않고 머리부터 물속에 들어갔다.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는 쿵.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에게 구조되어(?) 물밖으로 나온 후였다. 손을 살짝만 위로 들었어도 물 위로 몸이 떠올랐을 텐데 머리를 수영장 바닥에 밖다니....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기억이 맞다면, 그날 이후 수영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스타트 수업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풀장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스타트는 잊고 지냈다. 어른이 되어 수영을 배우고, 초급반에서 중급반이 되고, 중급반에 적응을 하자 스타트를 하는 상급반이 부러워졌다. 나도 스타트를 할 줄 알면 수영 대회에 나갈 수 있을 텐데. 꼴등을 해도 좋으니 물속 스타트가 아니라 스타트대 위에서 멋지게 뛰어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서는 상급반만 스타트를 배웠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과거 중급반 스타트 수업 중 다친 사람이 있어 스타트는 상급반만 배운다고 했다. 억울하면 상급반이 되는 수밖에 없는데, 상급반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벽 수영 강습시간엔 중급반 1번 레인(느린 레인)에서 2번 레인(빠른 레인)으로 넘어가기도 힘든데 상급반이라니. 어느 세월에.


그랬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상급반에 발가락 아니 온 몸을 담궜다. 월, 수, 금 주 3일을 낮수영으로 강습 시간을 바꾸었더니 상급반에 가게 되었다. 낮수영 상급반도 새벽 수영 상급반처럼 금요일은 '스타트 데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회원들은 이미 스타트를 배웠기에 나는 맨 뒤로 빠졌다. 첨벙 첨벙 뛰어드는 상급반을 바라보는데 왜 그리 주눅이 들던지. 두 팔을 뻗어 유선형 자세 만들 때처럼 머리 뒤로 넘긴 후 굽혔던 무릎을 펴고 물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며 수영 강사님이 자세를 하나하나 잡아 주었지만, 막상 뛰려니 겁이 났다. 처음엔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발을 떼자 자세가 엉망이 되버렸다.   


내가 수영장에 뛰어든 게 아니라 소용돌이 치는 물에 빠진 기분이었다. 뛸 때마다 수경에 물이 들어오거나 수경이 벗겨졌다. 그날 이후 스타트 데이만 되면 나는 자꾸 뒷걸음질 쳤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스타트를 못하는 스타일인 걸까. 스타트 후 50m 수영이라니. 한 번만 쉴까. 조용히 도망갈까. 도망가려고 그만둔 건 아니지만,  월, 수, 금 수영 강습 시간을 새벽 수영으로 바꾸며 다시 중급반 수영인이 되었고 스타트는 잊고 지냈다. 그저 매주 그 주에 중점적으로 훈련하는 영법에만 집중했다. 배영 주간에는 배영에 집중하고, 접영 주간에 는 접영만 생각하며.


혹시나, 커리큘럼을 궁금해할 예비수영인을 위해 수영 강습 방식을 설명하자면 한국에선 수영을 배우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순이다. 수영에는 4가지 영법 밖에 없으니 순서대로 배우고 나면 영법은 다 배우는 셈이다.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는 수영장의 경우 초급에서 접영까지 배운 후 중급반에 가게 된다. 초급반에서 초벌구이 정도로 수영을 배웠다면 중급반에서는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자세에 양념을 더해 제대로 맛을 내는 법을  배운다. (영법을 음식(고기)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 배가 고픈 상태로 브런치를 쓰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렇게 중급반 수영인들은 매주 다른 영법을 훈련하며 자유형과 배영의 롤링, 팔 꺾기, 평영 스타트 하는 법, 접영 가슴 누르는 법 등 수영의 디테일을 배운다. 수영장이나 강사에 따라 다르지만 사이드턴과 플립턴을 배우는 것도 중급반에서부터다.


"중급반 스타트 배웠어!"

2주 전 원고 마감을 핑계로 수영을 빠진 금요일 중급반 단톡방이 시끌시끌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제 중급반도 스타트를 배운다고? 상급반에 가지 않아도 스타트를 할 수 있다고? 역시 사람에겐 세 번의 기회가 오는 것인가. 이번엔 겁내지 말고 제대로 배워보자. 지난주 수요일엔 목요일의 스타트 수업을 위해 유튜브에서 '스타트 잘하는 법'도 찾아보았다. 스타트 잘하는 법 영상을 본다고 갑자기 스타트를 잘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자는 마음이었다.


대망의 중급반 스타트 수업 날, 수영 강사님은 킥판을 바닥에 깔고 무릎을 꿇은 듯한 자세로 하는 스타트를 알려주었다. 서서 할 때 보다 겁이 덜 났다. 그런 다음 서서 스타트를 하는데 다들 배치기를 하거나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렸다. 나 역시 겁이 나고 무게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서 살짝 흔들렸다. 그래도 배치기를 하지 않고 머리부터 물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번 뛰다 보니 여전히 수경이 벗겨지거나 수경 안에 물이 들어왔다. 배치기를 안 하는 대신 깊이 들어가 그렇게 뛰면 위험하다는 주의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대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대신 내일 또 해야지 하는 의지가 솟았다.  


수업 후 샤워실에서 만난 상급반 선배 회원들이 한 마디씩 했다. "스타트 별것 아니지?" "해보니 재미있지?" 아직 내겐 너무도 별것인 스타트를 별것이 아니라니. 아직 재미를 느끼기엔 정신이 없지만, 그 별것을 해낸(?) 중급반 회원들 사이에선 전우애가 싹텄다. '이 어려운 걸 내가 해냈지 말입니다.' 모드로. 전우 아니 수찬과 함께 성장하는 즐거움이란 이런 걸까. 하루에 1mm만큼이라도 성장하다 보면 나도 스타트 대 위에 서 있지 않을까. 나날이 성장하는 수영인으로 나이들어 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40대에 수영 대회에 출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선가 "Take your mark!"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배가 고파서 들리는 환청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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