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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Sep 06. 2022

“걱정 마세요. 좋은 데 가실 거예요”

아버지에게 보내는 엄마의 마지막 인사

오빠가 오자 반짝 컨디션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딸들과 며느리가 여행 중일 때 아프셨다.

그런 모습을 처음 지켜본 오빠는 말도 못하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제주도 동문시장을 어슬렁거릴 때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어젠 진짜 큰 일 치르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식사도 못 하시고, 가래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딸들이 없어서 불안하셨나? 원래 아빠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 해. 이제 괜찮으실 거에요.”

동생은 익숙하다는 듯 답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아프시다가도 곧 기운을 차리셨다.

동생은 아버지가 드시고 싶다고 하면 무엇이든 사다 날랐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넘길 수 있는 게 점점 줄었다.

당신의 소울푸드인 홍어무침도, 혀에 붙듯 넘어가는 육회도, 속을 풀어줄 것 같은 라면 한 가닥도….


식도암은 참으로 몹쓸 병이다. 소화 기능에 문제가 없는데 목으로 넘길 수 없다. 마음으론 꿀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목구멍에선 밥알 한 톨도 걸린다.

아버지가 못 드셔도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은 매일 무언가를 해 먹고 시켜 먹었다. 아버지도, 우리도 괴로운 일이었다. 몰래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아버지, 죄송해요. 어떡하겠어. 우리는 먹어야 해….” 미안한 마음은 립서비스로 때웠다.

“괜찮다. 맛있게 먹어라.”

시간이 갈수록 뼈만 앙상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식들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해 아버지 생신은 양력으로 쇠었다. 늘 음력으로 지내니까 몰랐는데,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아버지는 밥은 못 드셨지만 푹 끓인 미역국과, 좋아하시는 조기 한 마리를 맛있게 드셨다. 이렇게 드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얼마나 드시고 싶으셨을까…. 굵은 대가리 뼈만 남은 조기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생신 축하 노래를 하고 촛불을 끌 차례다. 케이크에 딱 한 개의 초만 꽂았는데, 아버지가 몇 번을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 다 함께 힘을 보탠다. 후~

아버지가 짧게 탄식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위태롭다. 그렇게 2021년이 지나갔다.  


섬망 증세라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아버지가 당신 동생들을 찾는다. 천장에 먼지가 많다고, 바닥에 물이 넘친다고, 어서 사람을 부르라고 하신다. 새벽에 내게 전화를 걸어 두서없이 이 얘기 저 얘기를 하신다. 누구 만나러 가야 한다고, 갑자기 밖으로 나가시려 한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오빠가 붙잡는데도 힘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안간힘을 쓰시던 아버지가 큰 고비를 넘으시나 보다. 거친 숨을 몰아 쉬시며 힘겨워하신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온 가족이 걱정할 때 아버지가 눈을 뜨신다.

“아이고, 죽다 살아났다.”

도통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씀을 쏟아내신다. 엄마가 가장 걸렸다 보다.  

“나는 엄마 먼저 보내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엄마의 강박 증세에 입버릇처럼 “내가 못 살아!”라는 말을 달고 사셨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만약 엄마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암투병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에게 아버지는 그저 ‘불쌍한’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갈수록 식사도 못하시고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보며 엄마는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안타까운 듯)“저 할아버지는 식구가 없나 봐.”

“어디가 아프신지 식사를 잘 못하시더라고….”


아버지가 투병 중인 동안, 엄마는 '착한' 치매 환자로 잘 지내셨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집에 계시고, 병시중을 위해 입국한 큰아들 내외까지 옆에 있어서 좋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를 당신 남편으로 인식하진 못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했다. (불행히도 나는 잠시 집에 다녀오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데 가실 거예요….”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엄마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는 암 진단 받으신 지 8개월, 마지막 생신을 쇤 지 꼭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암이어도 3년은 살지 않겠느냐고 걱정 말라고 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서둘러 가셨다.

어쩌면 당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셨던 성정과 닮은 마지막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사랑해요. 우리 나중에 좋은 데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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