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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ug 30. 2022

오빠가 왔다

엄마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 11월에 간다.”

“괜찮겠어? 회사에서 잘리는 거 아냐?”


캐나다에 사는 오빠 내외가 온다고 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신 건 아니니 조금 이따 와도 된다고 했지만, 엄마의 치매가 더 진전되기 전에 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오빠가 온다니 벌써부터 무거운 짐이 덜어진 느낌이다.


동생이나 나나, 오빠를 원망하진 않았다. 아들들이 외국에 살고 있으니 딸들이 부모님을 돌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친정에 갈 때마다 난 오빠와 페이스톡을 했다. 부모님께 오빠 얼굴도 보여드리고, 그간 있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다. 때론 괴롭고 힘든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버지마저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에 오빠는 괴로워했다. 몇 년 전에 뵈었을 때부터 안 좋았던 것 같다고, 그때 병원에 모시고 갔어야 했다고 가슴을 쳤다.


그러나 삶이란 이러구러 흘러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식사를 못하시는 괴로움을 TV 화면 속 음식으로 대신했다. 홈쇼핑에 나오는 양념갈비, 조기구이, 각종 탕류…. 수많은 먹방 프로그램을 보시며 입맛을 다셨다.

엄마는 요양사 선생님의 배려로 산책을 시작했다. 그래 봐야 동네 한 바퀴지만 사진 속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설레 보였다. 시장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이고, 권사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에요.”

(밝게 웃으시며) “네~”

잠시 후 요양사 선생님이 묻는다. “어르신, 아까 누구예요? 아는 분이세요?”

“몰라.”

하하하! 엄마도 함께 웃는다.

산책길 풍경은 이랬다 한다^^



 

오빠가 온다는 소식에 나는 여행 계획부터 세웠다. 코로나도 잠시 주춤하겠다, 이참에 무조건 동생이랑 바람을 쐬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올케가 맘에 걸렸다. 올케도 매일 손주들 돌보느라 고생한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언니, 우리랑 같이 가요. 조금 늦었지만 여자들끼리 언니 회갑 기념 여행 가자고요.”

“아니, 아버님 식사는 어떻게 하고….”

올케는 주저했지만, 아버지 간병은 앞으로 더 힘들면 힘들었지 좋아질 리 없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오빠, 오빠가 한국 오면 ○○랑 제주도 여행 갈 거예요. 엄마 아빠 밥, 잘 챙겨드릴 수 있죠?”

“그럼~ 걱정 말고 다녀와라.”

“그런데 올케언니도 같이 갈 거예요. 그리 아세요.”

“… …” (앗! 헉!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ㅎㅎ)


마음 같아서는 한 일주일 다녀오고 싶었지만, 오빠의 역량을 고려해 3박 4일로 일정을 잡았다.

가족이 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렇게 여자들 셋이 함께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오래도록 거닐었다. 오름과 숲의 숨소리를 조용히 느꼈다. 동서로, 남북으로,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을 달렸다. 한적한 주택가 찻집에서 맛있는 커피를 만났다. 맛집 앞에서 한 시간 넘게 줄을 서기도 했다. 계획하지 않은 듯 느슨한 일정이었지만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누군가를 돌보느라 허둥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들이었다.

동생은 앞으로 1년에 한 번은 이렇게 여자들끼리 여행 가자며 건설적인 제안을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청심환’ 같은 존재였다. 오빠가 오자 엄마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가족은 알아보지 못해도 엄마에게 큰 아들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주 보지 못하니 가끔 영상통화라도 연결해 드리면, 엄마는 머리가 햐얗다고, 왜 저렇게 늙었냐고 하면서도 아들인 줄 알아보셨다. (결혼도 안 하셨다면서, 아무튼 그렇다.)


엄마는 오빠가 옆에 있는 게 좋으면서도 곧 떠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금방 가야 되지?” 하고 물었다.  

오빠는 안 갈 거라고, 여기서 엄마랑 같이 살 거라고 안심시켰다.

과하다고 할 만큼 엄마가 자주 웃었다. 처음 며칠은 초저녁 잠도 뿌리치고 식구들이 있는 거실에 오래오래 앉아 계셨다.    

 

음식 솜씨 좋은 올케가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해 부모님께 드렸다.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식사를 뚝딱 하셨다. 부실한 딸들 때문에 그동안 배를 곯으신 것 아니냐는 농담이 진담 같아 찔렸다. 오랜만에 집안이 들썩들썩 사람 사는 것 같다며 아버지도 오랜만에 웃으신다.

  

엄마 식사는 오빠가 꼭 챙겼다. 골고루 드시라고 엄마 숟가락에 반찬을 일일이 놓아 드렸다. 나도 처음 본 오빠 모습이었다. 아마도 손주를 돌본 내공 덕분인가 보다.

엄마는 그게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우셨는지 매번 물었다.    

“나만 먹어?”

“네~ 저흰 나중에 먹을 게요.”

“같이 잡숴~” (엄마는 머리가 하얗게 센 아들에게 늘 이렇게 존대를 했다. 가끔은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으신 것도 같다.)

하하하!


오랜만에 온 가족이 많이 웃었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암투병중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마음 아파 하다가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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