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오는 말

희미한 계절의 끝단을 쥐고서

by 고요한밤


1.

사시사철 가장 총애하고 아끼는 계절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가을일 거다.

25년 넘게 해외생활을 살아온 중에

우리나라의 가을 같은 분위기를

흠뻑 느낄만한 주거 지역은 흔치 않았다.

8월 말부터 춥고 긴긴 겨울로 접어들어

당시 산후풍으로 뼛속까지 시리는 증상에

제대로 운신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지역도

가을이란 계절의 흔적이 아주 희소했고,

중국 심천과 홍콩 등 집중 호우와 태풍 속에서

일 년 내내 에어컨과 제습기가 함께 돌아간

고온다습 최고봉 관련 기억만 남아있는

동남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와서도 남캘리포니아 얼바인은

반팔 반바지로 일 년을 지낼 정도로

계절의 구분 자체가 모호했기에,

매년 아이가 새 학기를 시작하는 9월이 되면

한국 특유의 가을적 정취와

온갖 색색의 단풍이 가득한

고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그리워했다.

코끝의 미세한 바람에서 느끼는

아침 공기의 선선함이 다르게 다가올 때,

무엇보다 내 속의 감성 유전자, 세포, 혈액들이

먼저 꿈틀대며 반응하는 듯했으니.

거기에 가을과 관련된 옛 노래, 옛 추억들이

함께 몽글몽글 어우러지면,

밥을 굳이 안 먹어도 배부르고,

통잠을 자지 않고도 졸리지 않은 상태로

“나는 과연 잘살고 있는 건가“

수도 없이 반추하게 되는 시기,

그래. 지금이 바로 가을이구나!


https://youtu.be/V2Mzp7ewg9M?si=uYq1ZmVLKVnSVMnT



2.

북캘리포니아 베이 지역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청명한 가을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남캘리포니아 지역보단 사계절 구분이 뚜렷하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호세 지역에,

그중에도 동남쪽 변두리 우리 동네에도

그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스산한 가을 풍경이

나의 시간 속으로 훅 다가온다.


3.

오래 사신 분들에 따르면

예전엔 가을이면 엄마들끼리 차를 나눠 타고

멀리 밤 농장에 방문하여 햇밤을 사 오곤 했다고 한다.

운전을 즐기지도 않아 딱 필요한 최소로만 하고 살고,

산에 올라가 두툼한 장갑 끼고

나무 아래 밤 줍기를 절대 할리 없는 나로선

그저 한국 마트에 나오는 밤 사봤다가

밤벌레와의 전쟁을 몇 번 거치고는 거의 잊고 살았다.

인터넷 덕분에 집에서 온라인 주문과 배송이

편리하게 가능해진 걸 알고

작년에 처음 주문해 본 5파운드의 굵직한 밤들.

소금물에 담가놓았다가 과도로 칼집내고

에어프라이어 400F에 25분.

완성 후 냉동실에 20분 정도 냉각.

인터넷 참조하고 2주간 3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발굴해 낸 군밤 제조 자체 레시피이다.

갈라진 껍질 사이로 노오란 속살을 드러낸 알밤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까서 집락 봉지에 넣고 냉동실 행.

겨울밤에 생각이 날 때마다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구워 먹다 보니

한두 달도 버티지 못했었기에.

이번엔 더 넉넉히 주문하리라 벼르고 있다.


4.

어려서부터 군밤/군고구마 등을 먹고 싶어도

집에선 어쩌다 찐 밤과 삶은 고구마뿐

주전부리 간식이 흔치 않던 그 시절

숟가락으로 반 가른 밤의 삶아진 속살을,

형제들과 경쟁적으로 야무지게 파먹던 아동기를 지나,

은행잎 떨어지던 차가운 종로 거리에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 사이로

코끝에 전해오던 군밤의 향기는 so sweet.

하지만 가격 대비 꼴랑 몇 개만 담아주던

비싼 간식으로 인지가 된 탓인지

내돈내산 할 기회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젠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 먹고

Ice Age 만화 속 다람쥐가 도토리 쟁여놓듯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여유는 생긴 것 같은데.

건강을 챙긴다는 미명하에

줄여가는 음식 종류가 더 많아지고 있지만,

지금부터는 좀더 넉넉히 준비해서

“널 위해 준비했어. 뎁혀서 함 먹어봐”라고

노오란 알밤 한 봉지 슬쩍 전해줄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의 여유를 더 충전하고 싶어진다.

알밤의 맛처럼 달콤하고 든든한 나의 글 소식도

이 곳 브런치 사이트를 통해

계속 세상으로 전하고픈 바램도 함께.


그동안 부족한 글을 봐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매주 금요일, 새로운 주제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