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8 발표
갓 백일 지난 아기를 데리고
당시 유일한 국제선 공항인 김포 공항에서
양가 가족들의 눈물 섞인 환송을 뒤로하고
떠나왔던 영국의 북아일랜드,
내 첫 해외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혼여행 때 처음 비행기를 탈 정도로,
해외는 물론 제주도도 못 가본 촌사람이었던지라.
10시간 넘는 첫 장거리 비행과 경유의 긴 여정에
아기가 울지 않게 어르고 달래면서도
어리고 철없는 초보 엄마는
마냥 들떠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전임자가 살던 방 3개의 작은 단층집에 짐을 풀고,
파란 바탕의 축구공 무늬 카펫이 깔린 공간에
싱글 매트리스를 깔아 아기 방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
대부분 우중충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여서
창가에 서면 외풍으로 코끝이 시리곤 했다.
그 썰렁한 방에서 아기는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큰길에서 굽어진 작은 골목 안에 8집이 있었는데,
서로 울타리나 담이 전혀 없었다.
그곳 아이들은 앞집 9살 스캇을 대장으로
4살-9살 그 또래들이 경계 없는 그 공간을
무리 지어 마음껏 뛰어놀곤 했다.
날씨가 괜찮으면 저녁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하루 내내 자전거, 씽씽카, 축구 등
각종 종목을 바꿔가며 어우러져 노는 아이들 무리에
9개월에 걷고 돌 때 뛰기 시작한
우리 집 아기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고,
엄마로서 옆에 붙어 있느라 나도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9살 스캇의 동생인 6살 라이언은
당시 최연소 4살 조슈아가 삐질 만큼
우리 아이를 친동생처럼 이뻐해 줬고,
늘 우리 현관문을 두들기며 같이 놀자고 졸라댔다.
2살 생일파티도 그 아이들을 우르르 초대했었고,
저마다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선물로 들고 왔다.
남편은 유럽 지역 출장이 많아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당시 운전하고 거리가 멀었고
현지 면허증 따기엔 시간이 오래 걸렸던지라
아이랑 둘이 주로 집에만 있던 시기에,
서른 가구 정도 되는 한국 가정들 중에
친절하고 다재다능하신 분들의 도움이 컸다.
때 되면 귀한 김치도 담아 주시고
여러 모임에도 초대해 주시며 차편도 제공해 주신 덕에
그 시절 참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았다.
런던으로의 이사가 정해지고,
짐을 싸서 미리 보낸 후
맨체스터로 가는 심야 배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2년 반 살았던 집을 떠나던 마지막 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중에
마주 보는 앞집 유리창에 라이언이
떠나가던 우리를 슬프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없는 것도 많았고 때론 외롭기도 했으며
한국에서의 모든 지인들과 단절된 듯 했지만,
새로운 땅, 새로운 만남들로부터
오가는 정을 느끼며 따스한 위안을 받았던 그때가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